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넙죽의 간사이 여행 - 오사카

일본 제2의 도시, 오사카

by 넙죽

일본 제2의 도시, 오사카


한국에서 간사이 지방으로 여행하면 가장 먼저 발을 디디는 도시가 바로 오사카이다. 간사이 국제공항이 이곳에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교통이 편리해 여행의 거점이 되기 때문이다. 오사카에서 여행을 출발하면 관광지로 유명한 교토, 나라, 고베 등을 반나절 혹은 한나절이면 편리하게 오갈 수 있다. 이러한 위치 덕분인지 예부터 오사카는 일본의 상업도시, 대도시로서 성장해 현재까지도 일본 제2의 도시로써 자리매김하고 있다. 도톤보리에 가면 찬란한 네온사인들과 함께 사람들로 붐비는 번화가를 볼 수 있다.


오사카의 상징, 오사카성


벚꽃이 흐드러질 때에 오사카 성을 방문한 적이 있는가. 고교시설 수학여행으로 이곳을 찾은 기억이 있는 나는 아직까지도 그날의 오사카 성을 잊지 못한다. 오사카 성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근처 가게에서 파는 말차 아이스크림을 한 입 크게 베어 물고 나야 비로소 내가 오사카에 다녀왔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오사카 성의 상징과도 같은 천수각에 오르면 오사카 시내가 한 눈에 볼 수 있기 때문에 많은 관광객들이 적지 않은 관람료와 수고로움을 무릅쓰고 천수각 꼭대기에 오르기도 한다.

수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오사카 성을 지은 것은 우리에게도 익히 알려진 인물이다. 알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증오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이 인물은 바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이다. 천한 바늘장수 출신이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혼란으로 가득한 전국시대를 기회로 삼아 자신의 실력만으로 일본의 정점에 올랐다. 전통적인 무사가문도 아니고 문맹에 가까운 지식을 가졌던 그의 이력은 파격에 가까운 일이었고 자신의 실력만으로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서 정점에 올랐다는 점 때문에 아직까지 많은 일본인들의 존경을 받기도 한다. 그 뛰어난 실력 덕분인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을 통일하였고 전국시대에 종지부를 찍었다. 허나 인간은 만족을 모른다던가. 자신의 실력에 과한 자신감을 가졌던 그는 명나라를 정복할 야심을 품었으며 그 야심을 실현시킬 단계 중 하나로 조선 침략을 계획하였다. 그의 야심으로 비롯된 것이 바로 임진왜란이었으며 조선과 명나라, 일본 삼국 모두 피 흘리고 얻은 것이 없는 전쟁이었다. 이 전쟁의 업보 때문인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죽고 그가 이루어 놓은 모든 것들은 그의 경쟁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넘어가버리고 만다. 사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오사카성을 건립한 이유는 이 곳을 자기 가문의 근거지로 삼고 자신의 가문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실제로 오사카 성은 주변의 해자 깊고 매우 튼튼해서 강대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 조차 이 성을 점령하려고 할 때 상당히 애를 먹었다고 한다. 그러나 대세는 거스를 수 없었는지 결국 오사카 성은 함락되었다. 지금도 오사카 성을 방문하면 오사카 성이 얼마나 거대했는지, 얼마나 견고한 성이었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오사카 성의 해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경쟁자들


일본 역사를 통틀어 전국시대 만큼 많은 이야기거리를 남긴 시대가 또 있을까. 각 지방의 영주들이 각자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서로 경쟁하고 싸우던 전국시대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낸 세 인물이 있었다. 그 중 첫번째가 오다 노부나가였다. 오다 노부나가는 뛰어난 용병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장 빨리 두각을 나타내었다. 어쩌면 일본 통일에 가장 가까이 닿아있는 자였을 것이다. 그러나 믿었던 심복이었던 아케치 미쓰히데에게 배신당해 교토의 절인 혼노지에서 죽음을 맏이하게 되었다. 두번째 인물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이다. 히데요시는 앞서 말한 오다 노부나가 휘하에서 힘을 기르고 있었는데 오다 노부나가가 급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하자 빠른 판단으로 세를 규합해 그의 뒤를 이은 후계자가 되었다. 그리고 여세를 몰아 일본 통일을 완성시키고 그 정점에 자신이 섰다. 통일된 일본에서 좋은 정치를 폈으면 참 좋았으려만 그는 일본 통일에 그치지 않고 조선을 넘어 명나라까지 넘보며 자신의 야욕을 위해 수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켰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권력을 손에 쥐었어도 죽음만은 피할 수 없는 것이기에 그도 결국은 죽음을 맞이했다. 이 때 전국시대의 유명인 중 마지막 인물이 등장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히데요시 생전에도 막강한 영주였지만 히데요시가 죽을 때까지 그 힘을 숨기다가 그가 죽고 나서 자신에 대적할 상대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그 힘을 전면에 드러내어 일본 권력의 정점에 오른다. 그리고 자신의 막부를 세워 자신의 후손들에게 일본의 권력을 대대 손손 물려주게 된다. 오다 노부나가는 전쟁에는 뛰어났지만 일본 통일을 맛보지 못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통일된 일본을 거머쥐었지만 욕심을 과하게 부리다가 이내 그 권력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그대로 넘겨주게 된다. 일본의 최고 권력을 자신이 움켜쥐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후손들에게 물려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전국시대의 진정한 승리자가 아닐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동상

히데요시는 왜 쇼군이 되지 못한 것일까


전국시대를 통일하고 일본의 정점에 선 히데요시는 왜 무사들의 정점인 쇼군에 오르지 못하고 일본 조정의 관직인 관백에 머물렀다. 그는 일본의 최고 권력자였으면서도 왜 쇼군에 오르지 못하였을까. 여러가지 설이 존재하지만 그가 전통적인 무사 가문 출신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설이 가장 신빙성 있게 받아들여진다. 그는 원래 바늘장수 출신의 하층민이었기 때문에 전통적인 무사가문과의 끈이 없어 그가 쇼군에 오를 시에는 무사 가문들의 반발을 살 여지가 크기 때문이다. 본래 쇼군에 오르기 위해서는 처음 막부를 연 미나모토 가문과의 혈연적인 연관성이 중요하다. 두번째 막부를 연 아시카가 다카우지 역시 미나모토 가문의 방계 가문이었고 마지막 막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겐지 계열인 도쿠가와라는 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쇼군에 오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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