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llup lady
"근데 혜선아 우리 동창 중에 진희라고 기억해? 왜 있잖아 아빠가 대기업 임원이었던 애. "
먼저 정적을 깬 것은 윤경이었다.
혜선은 고교시절의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윤진희.
키도 크고 늘씬했고 공부까지 잘했던 완벽한 아이.
집까지 부유해서 학교 수업이 늦은 날이면 딱 보아도 집 한 채 값은 나가보이는 외제차로 부모님이 데려왔던 아이. 오랜 기억 속에 묻혀있었던 그 친구를 윤경이 끄집어 낸 것이다.
혜선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고 윤경은 대화를 이어갔다.
"나는 가끔 걔를 보거든. 나는 걔가 이쁘고 늘씬하고 집까지 부자니까 일찍 좋은 남자 만나서 시집 갈 줄 살았어. 걔네 아버지는 계속 승승장구하셔서 대기업 전무까지 하시고 걔 명의로 집이며 차며 다 사주셨대. 진희 자체도 우리 나라에서 손꼽히는 메이저 공기업에 다니니까 우리랑은 사는 세계가 다른거지. 근데 말야. 나 같으면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당장이라도 결혼할 것 같은데 그렇지가 않나봐. 선 자리에 전문직이며 고시 출신이며 좋은 남자가 나오는 데도 딱히 마음에 차는 남자가 없나봐. 오히려 자기가 가진 것이 많으니까 고려해야 할 것이 많은 거지. 집안이라던가 학벌, 소유 부동산, 직업 등등 말이야. 생각해보면 진희가 현명한 것일지도 몰라. 진희가 그러더라. 자기도 그렇고 부모님도 그렇고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갖추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는데 적어도 비슷한 수준을 갖춘 사람을 만나고 싶다고. 진희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난 참 서글픈 생각이 들더라. 사랑도 계급에 따라 하는 것 같아서."
혜선은 소주 한 잔을 들이켰다. 이상하게 윤경의 말을 들은 후 어린 시절 티비에서 보았던 동물 다큐멘터리가 생각났다. 수컷은 둥지를 마련하거나 먹이를 암컷에게 가져다줌으로써 구애를 하고 암컷은 그런 수컷의 구애를 받아들이면서 둘은 한쌍이 된다. 동물들의 둥지는 인간의 부동산이고 수컷이 가져다주는 먹이는 높은 연봉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제적 풍요가 삶을 안정적이고 윤택하게 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남자들 또한 안정적인 직업의 집안 좋은 여자를 만나고 싶어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혜선은 생각했다. 남자들 입장에서 별볼일없는 직장에 집안도 볼 것 없는, 게다가 빚까지 있는 자신은 참 매력없는 배우자감이겠다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적인 능력이 매력이 되는 것은 당연하지만 혜선은 참 씁쓸했다. 그래서인가. 이 날 따라 혜선의 목을 타고 흐르는 소주의 맛이 유달리 쓰고 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