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그렇듯 혜선은 회사로 출근했다. 프린터가 인쇄하는 소리. 사무실로 걸려오는 전화 벨소리들이 이날도 평소와 다르지 않음을 말해주는 듯했다. 그러나 이런 일상적인 모습과는 달리 유독 일상적이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항상 무엇이 좋은지 미소를 머금은 얼굴에 어떤 힘든 일에도 너털 웃음 한번에 흘려보내던 사람. 자신의 업무가 바빠도 주변을 돌며 주위 사람들의 기분을 챙기던 사람. 기분이 좋은 날에는 팀원들에게 밥도 척척 사던 사람. 바로 사람 좋은 이선준 대리였다. 항상 그랬던 이 대리가 이 날 만큼은 달라 보였다. 어딘가 얼빠진 얼굴. 이 대리는 자신에게 걸려온 업무 전화도 한참 후에야 받고 누군가 옆에서 말을 걸어도 건성 건성 대답했다. 그의 모니터 화면에는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하얀 화면에 까만 커서만 깜빡이고 있을 뿐이었다. 업무에 전혀 집중하지 못하는 상태. 아니 혼이 나간 상태라고 해야 더 정확할 것이다.
혜선은 그에게 무슨 일이 있는 지 궁금했다. 평소 다른 사람들의 일에 신경쓰지 않는 마이웨이 성격의 혜선이었지만 이 대리에게는 왠지 모르게 관심이 갔다. 그동안 그에게 얻어먹은 점심밥에 대한 부채감이었을까. 아니면 항상 밝았던 사람의 갑작스러운 변화에 대한 호기심이었을까. 혜선은 자신답지는 않지만 이 대리를 챙겨보기로 했다. 어줍잖은 동료의식일지도 모르겠지만.
혜선은 탕비실에 가서 새하얀 종이컵에 달달한 믹스커피를 두 잔 탔다. 하나는 자신의 것. 다른 하나는 이 대리의 것. 그리고 커피 한잔을 이 대리의 책상 위에 올려두고 말을 걸었다.
" 이 대리님. 혹시 무슨 일이 있어요? 오늘따라 표정이 안 좋아 보이네요."
이 대리는 멋쩍은 억지 웃음을 지며 혜선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답했다.
"아...사실 여기서 이야기 하기는 조금 그런데 잠깐 나가서 이야기 할까요?"
혜선은 바람도 쐴 겸 사무실에서 나가 회사 건물 뒤에 위치한 주차장으로 이 대리와 함께 나갔다.
이 대리는 잠시 주변을 둘러 본 후 그들 밖에 없음을 확인한 후 조심스럽게 말을 시작했다.
" 후우...어디부터 시작해야할 지 모르겠네요. 사실 직장동료인 혜선 씨에게 이런 말을 해도 될까 싶기도 하지만 이제 사무실 모두가 알게 될 일이기도 하니까. 그냥 말할게요. 나...사실 여자친구와 헤어졌어요. 나 전에 상당히 오래 만난 여자친구가 있다고 말했었잖아요. 내년 즈음 사무실 분들에게 결혼할 것이라고도 말했었구요. 그런데 갑자기 헤어지게 되었어요. 팀장님이나 이사님이나 모두 제가 내년에 결혼하는 줄로 아시고 회식때마다 직원들끼리 돈을 모아 냉장고며 세탁기며 사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분위기인데 어떻게 말해야할 지...참... "
혜선은 예상치 못했던 대답에 상당히 놀랐다. 사실 이 대리가 대학시절부터 오랫동안 교제한 여자친구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결혼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까지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둘의 사이도 크게 문제가 없다고 들었는데 갑자기 헤어졌다는 소식에 어안이 벙벙하기는 했다. 혜선은 헤어진 이유에 대해서 이 대리에게 묻기로 했다.
"혹시 왜 헤어졌는지에 대해서 물어도 될까요?"
"음...이야기 하기는 조금 길어서요...다음 기회에 이야기 해도 될까요? 이야기가 길기도 하고 맨정신에는 털어놓기가 조금 힘들 것 같네요. 자리를 비운지 오래 된 것 같은데 이제 사무실로 들어가죠?"
이 대리는 멋쩍어하며 대답을 했고 혜선은 손목에 찬 낡은 손목 시계를 확인하며 생각보다 사무실을 비운 지 오래 된 것을 확인한 후 고개를 끄덕였다. 사무실에 돌아와 자리에 앉은 뒤 혜선 이 남자의 이별 이야기에 대해서 더 듣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왜 그런지는 자신도 몰랐다. 그저 이선준 대리가 예전 처럼 밝은 모습으로 돌아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고 약간의 위로를 해주고 싶다는 마음도 들었다. 그런 마음에 혜선은 사내 메신저에 접속해 이선준 대리에게 쪽지를 보냈다.
'오늘 시간 있으면 퇴근 후에 술 한잔 해요'
대답은 생각 보다 빨리 왔다. 오케이였다. 장소는 회사 근처 곱창집. 소주 한잔과 함께라면 무슨 말이든 털어놓겠지. 퇴근 시간이 되었고 그날 따라 정시 퇴근하신 팀장님 덕에 예상햇던 시각 보다 조금 일찍 혜선과 선준은 마주보고 앉을 수 있었다. 지글 지글 소리를 내며 익어 가는 소곱창의 맛이 여물기를 기다리며 둘은 소주 한 잔씩을 기울였다. 이 대리 즉, 선준이 먼저 대화를 시작했다.
"솔직히 조금 놀랐어요. 회사에서는 말없이 업무만 열심히 하던 사람이 나에게 먼저 커피를 권하고 나의 상태를 챙긴 것이 사실 조금 차가운 사람이라고 생각했었거든요.그리고 고마워요. 오늘은 술이 고픈 날이었는데 먼저 누구한테 마시자고 할 마음 까진 들지 않아서 고민하고 있었던 중이었거든요."
혜선 또한 스스로도 지금 이런 모습이 평소답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선준의 말에 대답했다.
"누가 봐도 술이 고픈 얼굴이었으니까요. 나도 소주는 좋아하는 편이라 알아볼 수 있었어요. 아프고 힘들 때는 소주만한 것도 없죠. 자 이제 털어놔요. 지금은 시간도 넉넉하고 맨정신도 아니니까요."
선준은 더이상 피할 재간이 없다는 것을 직감한 듯 체념하고 말을 시작했다.
" 둘 사이에는 문제가 별로 없다고 생각했어요. 나 혼자만의 생각일 수도 있겠지만요. 특히나 결혼 준비하기 전까지는요. 근데 막상 결혼 준비를 시작하니 현실이더라구요. 여자친구는 서울에서 집을 얻고 신혼살림을 시작하고 싶어하는데 혜선씨도 알다시피 요즘 서울에서는 집을 사기는 커녕 전셋집도 구하기 힘들잖아요. 더구나 시내 중심가에 역세권이면 더더욱 어렵구요. 특히나 빌라도 아니고 아파트의 경우엔 더 심해요. 직장생활을 시작한지 이제 고작 5년 남짓인데 스스로 모아서는 절대 얻기 힘들죠. 그나마 부모님의 도움을 받는다해도 어려운 것은 매한가지에요. 어른들은 처음 시작은 작은 데에서 시작해도 좋다. 점점 키워 나가면 된다라고들 하시지만 현실은 안그래요. 돈을 모으는 속도보다 집값이 오르는 속도가 훨씬 빠르다 보니 처음부터 어느 정도의 자본이 있지 않으면 집을 사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죠. 집을 구하는 것부터 쉽지 않으니 결혼 준비는 잘 진행되지 않았어요. 게다가 여자친구는 결혼에 대한 낭만이란 것이 있었나봐요. 평생의 한번이라는 결혼식만큼은 누구보다도 화려하기를 바랐어요. 마음만 같아서는 하늘의 별이라도 따다주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현실적으로는 참 힘들었어요. 더군다나 집을 구하는 데에도 애를 먹는 나로서는요. 점점 다툼이 심해졌고 결국에는 헤어지게 되었네요. 아직까지는 좋아하는 마음도 크고 둘이 좋아하는 마음만 있으면 어떤 현실이든지 다 이겨나갈 수 있을 것 같았는데 현실은 참 다르더라구요. 현실이란 놈이 서로에 대한 마음을 갉아먹기 시작하고 서로 사랑했던 추억마저 색을 바래게 해요. 그만큼 현실이란 놈은 힘이 참 세네요."
말을 마친 선준의 눈에는 약간의 물기가 어른거렸다. 어린 아이처럼 풀이 죽은 채로 앉아있는 그에게 혜선은 다가갔다. 혜선은 알고 있었다. 어줍잖은 위로의 말로는 그에게 전혀 위로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그저 상준의 어깨를 두들겨 주며 말없이 소주 잔을 함께 기울여주는 것만이 지금 그에게 혜선이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위로였다.
며칠이 지나고 어느 새부터인가 이 대리는 출근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또 며칠이 지나고 어느날 팀장님의 책상 위에 언제 놓였는지도 모르는 사직서가 올려져 있었고 사무실의 모두는 직감적으로 그것이 이 대리의 것임을 알았다. 실연의 상처가 너무 컸을까. 아니면 그의 앞에 놓여진 현실의 벽에 좌절을 했었던 탓일까. 이 대리는 그의 아픔을 극복하지 못했고 퇴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