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충우돌 사이드 프로젝트] #3. 젤 멋있는 언니가 지금 애가 둘이다.
우리의 첫 만남은 2007년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장화, 홍련과 올드보이, 1990년대 학번들이 각자 영화광들이 되어 미친 듯이 디깅을 하다 하나 둘 그 결실을 세상밖으로 내보이던 시절이었다. 뭐가 개봉만 하면 괴물, 살인의 추억, 친절한 금자 씨 서로 앞다퉈 박찬욱, 봉준호의 신작을 만날 수 있던 시절이었던 거다. 나는 붙어놓은 실내디자인 전공에는 관심도 없고 그저 영화에 미쳐있었다. 그 길로 독립영화제의 자원봉사를 하다 흘러 흘러 영화를 배우게 된다.
내가 고작 스물둘셋이었을 때니까 언니는 이제 막 서른. 우린 영화도 끝장나게 만들고 놀기도 끝장나게 놀았다. 록페스티벌을 갈 때면 언니 차를 얻어 타고 다녔고 영화도 많이 봤다. 다들 영화에 대한 환상은 사그라들어 각자 취업 전선으로 뛰어들었을 때도 고민이 생기면 간간히 만났었다. 한국의 락페는 그 규모가 언니의 큰 그릇?을 담지 못해서 해외로 나가기도 했다. 그런 무용담들은 자취하던 언니 집에서 드러누워 밤을 새우며 듣고 시시콜콜 사는 이야기에 대한 꽃을 피우기도 했다. 지금 언니가 사는 모양이 나는 딱 좋았다. 이대로 영원히 이렇게 멋지게 살아줬음 했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가 막 지금 내 나이였을 때 결혼에 대한 고민을 할 때도 나는 그저 그런가 보다 했다.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물론 너무나 모범생이었고 또 일도 야무지게 하는 똑순이었기에 일탈을 즐기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녀만은 어떤 선택을 해도 자기식대로 멋지게 해 나갈 거라는 생각이 있었다.
결혼을 하고 나니 왕래는 뜸해질 수밖에 없었다. 나도 나의 삶을 정신없이 살아내다 문득 어느 날 약속을 잡아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아이 엄마가 되어있었다. 마지막 연락에 분명 마사지 잘하는 이모에 대한 정보 공유를 하고 있었는데... 연락하지 않은 공백의 시간 동안 훨씬 차분해진 모습의 성숙한 언니가 나에겐 몹시 새로웠다. 나는 어느새 우리가 밤을 새우며 놀던 그 시절 그녀의 나이가 되어있었다.
여전히 그녀는 일을 야무지게 챙기고 출장을 가고 때로는 야근으로 힘들어하는 일은 같다. 그 대신 거기에 더해 두 아이의 엄마 역할이 생겼다. 육아에 대한 고민, 또 그 상황에서의 기회 같은 것들에 대해 이야길 나눴다. 그녀의 다른 점은 육아생활에서의 불편한 점이 있을 때 불편해하고 말기보다는 해결하려는 시도를 해본다는 것. 아이를 키우며 학업도 놓지 않았고 그곳에서 만난 좋은 인연의 구성원들과 느리지만 꾸준하게 사이드 프로젝트를 하고 있고 그 팀에 브랜드 총괄을 담당해 줄 사람을 찾고 있다고 했다.
이렇게 지금의 팀원들을 만나고, 프로젝트명만 존재하던 우리의 결과물에 실체를 부여하는 일을 담당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