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장의 그림에 담긴 삶의 순간들
친구 K의 집들이에 갔을 때였다. 차로 10분 거리 우리는 아주 가까이 살았음에도 왠지 가정을 꾸리고 나서는 선뜻 "놀러 갈래!"라고 말하진 않았다. 연말, 드디어 나를 초대한다는 그녀. 함박눈이 내리는 날이었고, 연말 내내 계속 끝도 없이 침잠하는 중이었다. 당일 컨디션 역시 몹시 좋지 않아 온몸이 신발도 맞지 않을 만큼 부어있었다. 약도 안 먹고 버티다 약국 약 몇 알을 주워 먹고 최대한 편한 옷들을 챙겨 입고 갔다. 사실 맛 좋은 커피를 줄려고 사둔 터라 꼭 전해주고 싶은 맘에 가는 길이 설레기도 했다.
예상 대로 그녀의 집은 그녀를 닮아 곱상했다. 대학시절 우리는 K를 늘 곱상이라고 불렀다. 벚꽃이 흩날리는 봄날, 그 아래 돗자리를 깔고 앉아있으면 그곳이 바로 그녀 자리였다. 늘 프리지아 향이 은은하게 나는 꽃 같은 너.
누구나 그렇듯 '죽이 잘 맞는' 대화 상대가 있는데, 그녀의 부군과 예상외의 티키타카로 나의 컨디션이고 뭐고 아랑곳없이, 눈치도 없이 밤 12시가 되도록 수다를 떠들어재꼈다. 무슨 핑계고도 아니고...
꼬꼬물 수다에 어느 한 자락, 그들의 결혼 승낙기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지고 집안의 반대를 어떻게 헤쳐나갔는지 흥미진진한 파트가 나오자 K가 쪼로로 방으로 들어가 뒤적거리더니 하이케 팔러라는 작가의 100 인생 그림책을 들고 나왔다. 0세부터 100세까지의 삶 속에서 마주할 수 있는 순간들에 대한 섬세한 코멘트와 질문들이 담겨있다. 부모님에게 선물했다는 이 책은 몇 마디 말 대신 서로의 눈물로 많은 것들을 나눴다고 했다.
나는 현재의 내가 냉철하지도 마냥 감성적이지도 않은 어느 경계에 자리 잡고 있어 크게 감흥이 없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그래서 더 다행이었는지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 대한 글을 쓰는 이유는 대부분의 내용에 통찰과 경험이 켜켜이 쌓여있는, 앞서 간 사람들의 목소리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책의 독자는 모든 사람들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작가는 너무나 영리하다.
업무가 과중한 와중에 얄팍한 접근으로 책 소개를 하려고 했던 것이 또 깊이 빠져들게 되었다. 안돼 그만 쓰고 일해야 한다!!!!!!!
영상에 공개된 구절 몇 가지를 공유한다. 사실 더 많은 귀한 장면들은 화면에 담겨있지 않다. 꼭 책을 사서 보기를 추천. 주위에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봐도 좋고 혼자 봐도 좋을 책이다. 이 책을 읽다 문득 훌쩍거리는 상대를 만난다면 그 혹은 그녀는 따듯한 사람일 것. 혹은 덤덤하게 끄덕이는 사람이 있다면 표현이 서툰 사람일테니 눈을 맞추고 안아주기를.
이런 낭만 어린 시선으로 지금 현재 머무는 순간의 소중함을 공유할 수 있는 상대가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OX66KZK5G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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