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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eK Jan 24. 2024

무정물에 마음을 두다.

아 뭐 그냥 핸드폰 바꿨다는 얘깁니다.

'-에' vs '-에게'를 어떻게 구분할까?



벽에/벽에게 대고 말하는 것 같다.

냥이에/냥이에게 하소연하다.

일에/일에게 열정을 쏟는다.

연인에/연인에게 기대다.



'-에' vs '-에게'의 구분은 감각이 있냐 없냐로 구분한다. 감각 혹은 의지가 있는 대상이라면 유정물(有情物), 감각을 가지지 않았다면 무정물(無情物)이다. 보통 유정물에는 + '-에게' 무정물에는 +'-에'를 결합하면 오류를 줄일 수 있다. 


물론 현대과학으로 정밀한 잣대를 들이대면 이 경계는 모호해진다.(DNA가 없는 일부 단백질 형태가 생명체처럼 증식하거나 전파될 수 있는 케이스를 발견했다고 한다.)


불교철학에서 역시 무정물을 정의함으로써 이 경계에 대한 정리를 한다. 


"유정무정 유형무형(有情無情 有形無形) - 모든 존재가 다 불성(佛性)을 지니고 있다.
“불성은 모든 것에 가득하고 풀이나 나무에도 깃들어 있으며, 개미에게도 완전히 퍼져 있으며, 가장 미세한 먼지나 털끝에도 있다. 불성이 없이 존재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의미를 풀어보면 하찮다고 생각되는 발아래의 꽃을 신비로운 마음으로 지켜보기 위해 고개를 숙임으로써 나에게 날아오던 화살을 피하게 될 수도 있고, 밤길에 차를 타고 가다가 불쑥 나타난 토끼 한 마리를 피하려다가 사고가 나게 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사소한 사건 하나가 내 운명을 갈라놓을 수도 있다. 내 운명을 변화시키는 것이 반드시 인간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하찮다고 생각했던 무정물이 내 생사를 결정지을 수도 있고, 내 운명을 변화시킬 수도 있다. 이 우주의 모든 유정물과 무정물들이 모두 나와 연결되어 있다. 


 (출처 : https://moktaksori.kr/Writing-1/?q=YToxOntzOjEyOiJrZXl3b3JkX3R5cGUiO3M6MzoiYWxsIjt9&bmode=view&idx=15959713&t=board)


유정물과 무정물이 결코 다르지 않음을 안다면 자연스럽게 무정물 또한 귀하게 여겨라.라는 말로 귀결될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유정물에게도 지나친 기대를 하지 말라는 말이 되기도 한다. 어떤 것도 더 존귀하거나 덜 존귀한 것이 없다는 것.

핸드폰 바꿨다는 얘길 이렇게 어렵게 할 일인가 싶지만, 나는 무정물에 마저 미련이 많은 인간. 



찾아주면 15만원의 사례금을 받을 수 있다는 기안 84의 지갑. 돈을 벌게 해 준 지갑이라 여벌을 마련해 두고 고쳐가며 쓰고 있다고.


고3 때 수능 끝나자마자 구입한 스타택을 시작으로 레이저, 싸이언, 아이폰4s, SE, X, 12프로 까지 18년 동안 7개 정도의 모델을 썼으니 평균 2.5년 정도 쓴 셈이다. 새로운 모델이 나오면 당장에 바꾸기보단 필요를 느낄 때까지 기다리는 편이다. 애플이 데이터 마이그레이션을 지원하고부터는 새로 세팅해야 하는 시간을 절약하게 되었지만, 그럴수록 더욱 새 핸드폰 사는 느낌이 들지 않기도 한다. 


전기차만 트레이드인 하는 줄 알았더니 요새는 헌것 주면 새것을 주고, 그 당시의 감정가를 현금처럼 사용할 수 있다. 그 역시도 나는 거절한 채 할매처럼 구모델을 차곡차곡 모은다. 이유는... 없다.


사실 몇 달 전부터 쓰던 핸드폰 상단 바가 터치가 되지 않았는데 그냥 아쉬운 대로 버티며 썼다. 그것 말고는 특별히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고 나는 이 핸드폰을 특별히 여겼던 것 같다. 새로 받아 들었던 때를 떠올리기도 했다. 전혀 서프라이즈가 아니었음에도 일 년 내내 착한 일을 하고 산타에게 선물을 받는 아이처럼 기뻐했다. 유독 살 때부터 색은 뭐가 어울릴까? 용량은 어떤 게 좋을까? 고민이 많기도 했다. 물론 이 핸드폰이 나에게 기안 84의 지갑처럼 성공을 담보하는 부적의 역할을 하진 않았지만, 애착 인형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새로운 시작의 상징이기도 했다. 이 아픈 손가락은 한 달 전부터 혼자 화면을 옮겨 다니며 아무 메일이나 열어보고 네비의 경로 안내를 종료해버리거나 기껏 어렵게 써 둔 글 발행을 취소하는 등의 만행을 저지르기 시작했다. 그냥 두면 좀 나아지려나 했는데, 증상은 점점 괴랄해졌다. 이쯤 되자 아무 번호나 눌러 전화를 하거나 중요한 데이터를 지울 일이 걱정되었다.


몇 번이고 가까이에 있는 여의도 매장으로 달려갈 기회는 많았지만, 나는 기어이 핸드폰을 꺼두기에 이르렀다. 나답지 않았다. 뭐든 빠릿하고 즉각적으로 반응하기보다 지켜보고 묵혀두는 일이 익숙해진 탓이다. 자연스럽게 디지털 디톡스를 하게 되고, 안상수 옹처럼 메일만 주고받고도 충분히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안상수 디자이너의 인터뷰 중, 전화를 잘 쓰지 않는 이유 언급 (https://wordandview.imweb.me/Article01)


물론 잠시잠깐 거만을 떨고 곧 정신을 차렸다. 빠릿빠릿하게 통화와 문자가 수월히 되는 성실한 노동자가 되어야 한다. 거장의 연락을 기다리는 일에는 여유가 있겠으나 나에게는 그런 여유가 허락되지 않는다. 판교에서 미팅을 마치고 퇴근행렬에 걸려 느릿느릿 차를 운전해 오며 백업도 하고 정리해 둔 뒤 행선지를 여의도로 옮겨 새 핸드폰을 들고 왔다. 구매 후 인증 처리를 하는 동안에도 귀신 씐 듯 여러 앱을 혼자 켜고 끄며 돌아다니는 핸드폰을 보더니 애플 직원도 "아... 이거 무서운데요... 어떻게 계속 쓰셨어요?" 라고 나의 기이한 인내에 위로의 말을 건네주었다. (이 직원은 이 핸드폰 귀신에 함께 홀려버린 건지 내 유심을 먹어버렸다... 내 유심 내놔요 애플양반...) 주차를 다섯 시간이나 받고 '어딜 가나...' 서성이다 행운 버거나 하나 집어먹을까 했는데, 올해의 마지막 행운은 여의도 직장인들이 점심에 다 쓸어갔다고 했다. 내년을 기약하며-


너는 어떤 식으로도 명명하지 않을 것이다. 설렘도 기대도 없이 그저 기계로 대해주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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