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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eK Jan 31. 2024

유령도시였던 DMC를 유령처럼 돌아다녔던 이유

시네마테크 KoFA 한국영상자료원의 귀중함


대학생이었던 2000년대 중반, 늘 지갑은 가볍고 앎에 대한 호기심은 대단했던 시절, '뭐든 알고 배워라'라는 말씀으로 문화 예술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던 부친은 뻔한 용돈에 영화 공부는 망설이지 말고 하라고 엄마 몰래 스폰지 하우스(https://cafe.naver.com/spongehouse?iframe_url=/MyCafeIntro.nhn%3Fclubid=10086955 아직도 카페가 남아있다..) 서포터라는 이름의 연회원을 몇 해 동안 등록해주셨다.(지금 생각하면 쉬운 일이 결코 아니다.) 연회원은 연간 상영되는 모든 작품을 횟수 제한 없이 볼 수 있었고, 커피도 시켜먹을 수 있었으며, 동반 입장을 할 친구도 데려갈 수 있었다. 그래서 늘 틈만 나면 시네코아 아트홀과 조선일보 건물을 오가며 양질의 영화예술을 접할 수 있었다. 예술영화의 배급과 상영을 서포트한다는 뿌듯함은 덤이었다. 인생 처음으로 누린 호화로운 멤버십이었을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영상자료원(https://www.koreafilm.or.kr/main)에서만 볼 수 있는 것들도 많았다. 6호선 디지털미디어시티는 지금 새로운 방송 메카로 굳건히 자리 잡았지만 그때 당시엔 겨우 난지도와 허허벌판, 몇 동의 공장들만이 있었고 2002년 월드컵경기장을 지어 올리면서 동시에 6호선을 연결하고 그 주변으로 부지런히 아파트와 기술 기업들을 위한 업무 지구를 지어 올렸다. 월드컵이 끝나고도 계속 개발은 진행 중이었기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아직 들어오지 못해서 큰 천재지변이 일어나서 인류가 이룬 모든 것이 멸망? 한 채로 껍데기만 남아버린 유령 도시의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지금의 의리 뻑적지근한 상암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배차간격이 긴 버스만 고요하게 오가던 동네. 물론 이때 자차가 있었다면 훨씬 문화생활이 윤택했겠으나, 그때는 뚜벅이 인생이었기에 늘 지하철을 타고 내려 다시 버스를 타는 수고를 하면서도 히치콕과 김기영, 신상옥 감독 등의 작품을 남는 게 시간이었던 학생이 내가 보고 있는 게 얼마나 위대한 건지 미처 알지도 못한 채 즐겼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을 보고 나와서 울렁거렸던 일도 생각난다. 저 때는 하루에 3회의 영화를 연속으로 봐도 지칠 줄 모르던 시절이다. 박찬욱, 봉준호와 같은 시네마테크에 자주 출몰하는 스타 감독들을 보고 가슴 떨리기도 했다. 그런 추억 서린 시네마테크 KoFA가 유독 요즘 생각나는 것은 왜인지 모르겠다. 아이폰 나오던 시절이 아니라 간직한 사진들이 어디에 있을는지. 아련할 뿐.


지금은 알까? 영화를 보고나면 이렇게 종이 티켓을 소중이 들고와 다이어리에 붙였다. 그리고 영화 한 편에 6,000원이었다.


나는 낙원상가 위의 아트스페이스나, 인디포럼과 서울 독립영화제를 열던 서울극장, 시네큐브, 스폰지하우스, 상상마당 등 예술영화를 작고 알차게 틀어주던 시절에 20대였던 일이 눈물 나게 고맙다. 그때는 아직 유튜브도 OTT도 없던 시절 우리는 모두 발로 뛰고 극장 문을 찾아 열고 영화를 봤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그저 낭만의 문제다.


나는 유령도시를 유령처럼 하염없이 떠돌던 때의 낭만이 그립다.


그리움을 반가움으로 치환하기 위해 히치콕 특별전을 보려고 하니 게으른 나는 여전히 자격이 없다. 이미 매진 매진 매진. 히치콕은 특히 스크린에서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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