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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eK Mar 15. 2024

그의 부끄러움이 나는 반갑다

인간 존엄의 상징, 부끄러움에 대하여


2024년 2월 15일.


늘 그랬던 것처럼 점심을 때에 맞춰 챙겨 먹고 보이차를 내려먹으며 저녁 약속을 기다리며(사실 오랜만에 거나하게 술을 한 잔 걸칠 계획이었다) 좀처럼 진전이 없는 제안서를 사부작 거리고 있을 때, 032-로 시작하는 번호의 전화를 받았다. 평소 같으면 스팸이겠지 싶어 전화를 받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그냥 손에 쥐어져 있어 얼떨결에 받았다. 응급실 전화였고 당황한 나는 나답지 않게 병원 이름을 여러 번 물어보며 말을 더듬고, 식탁 다리에 새끼발가락을 찧고도 아픈 줄도 모르고 집히는 대로 입고 들고 달렸다. 사실 두번째에는 의연해질 줄 알았는데, 처음이 아니라도 늘 처음 겪는 것처럼 늘지 않는 것도 있다.


그게 벌써 한 달 전의 일이다.


이제 아빠는 ICU가 아닌 9층 일반 병실에서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하루는 머리 삽관을 빼고, 

하루는 혈전 생성 예방을 위한 전기자극 기구를 빼고, 

왼쪽 눈을 오른쪽과 비슷하게 뜨고 있는 날이 점점 많아지고

어느새 정맥관도 사라졌다. 

양팔, 양 발등에 검푸르게 물든 주사자국도 노랗게 변해가고 있다.

금식을 하다 미음을 콧줄로 먹기 시작하고

잠들어있는 시간보다, 어쩌고 저쩌고 말하는 시간이 늘어난다.


이렇게 쓰고 보니 새삼스럽고 대단하기까지 한 변화들이다.


일주일 전까지도 복부팽만 때문에 고생하던 아빠는 잠깐동안 장에 관을 연결해, 화장실을 갈 필요가 없는 상태로 있었다. 며칠은 별 생각이 없는 것 같더니 어느 날엔가, 화장실 가고 싶으니까 일으켜보라고 했는데 그 순간 나는 잠시 생각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아빠 머리 치료가 중요하니까 괜히 위험하게 움직이지 않아도 되게 그냥 편하게 누워서 할 수 있게 해 놨으니까 화장실 가지 않아도 돼." 


뭐 대충 저런 식의 설명이었던 것 같다. 내가 들어도 뭐라는 건지, 제일 가려운 곳만 피해서 이상하게 주변만 긁고 있는 답답한 설명이 아닌가.


그런 나의 멍청한 설명을 듣고 잠시 아빠는 가만히 침묵하더니



슬프다.


그는 응급실에 실려온 지 3주 만에 "슬프다."는 자조적인 말을 처음으로 한숨처럼 내뱉었다.

 

그동안 ICU에서부터 패드를 갈아주는 간호사와 조무사들에게도 늘 젠틀하게 감사의 인사를 전해서 젠틀맨으로 유명해진 사람이었다. 그 젠틀함 뒤에 한탄과 슬픔을 숨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근데 슬프다고 제 입으로 말했다. 그 순간에는 인정도 있고 슬픔도 있다. 그렇더라도 밖으로 뱉어낸 순간 그건 이미 극복한 일이지 걱정할 일이 아니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많은 생각이 스쳤다.

우선은 아무렇지 않은 듯,


"뭘 슬퍼! 잠깐 필요해서 한 건데, 금방 없앨 거니까 괜찮아!"


라고 말하고는 얼른 다른 얘길 했다. 그 다른 얘기는 뭔지 기억나지 않았다.


근데 나는 그의 슬픔이 이상하게 기쁘고 반가웠다. 병상에 누워, 부끄러움을 느끼는 그가 반가웠다. 


'아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어.'

그것은 나에게 희망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그 희망은 며칠 안되어 정말 현실이 되었다. 관은 사라졌고 다시 패드 생활로 돌아왔다. 곧 그는 화장실도 스스로 가게 될 거다. 시간이 해결해 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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