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영, 『 들뢰즈의 영화철학』 - "시네마"를 넘어서』 서평 및 후기
요새 나는 작업실 근처 철학서점에서 진행되는 독서모임의 다양한 분야를 시도해보고 있다.
오늘 모임에서 다룬 책은 이지영 저자의 『 들뢰즈의 영화철학』 - "시네마"를 넘어서』이다.
나에게 늘 도전하는 영화가 뭐냐고 묻는다면, 대번에 떠오르는 것이 데이비드 린치의 『멀홀랜드 드라이브』다. 특별전의 기회가 있을 때마다 보지만, 볼 때마다 쉽지 않다. 무엇보다 당황스럽다. 이야기를 따라가려고 해도 자꾸 좌절한다. 등장인물들은 한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이고, 시간은 앞에서 뒤로 흐르지 않고, 반복되거나 되감긴다. 이야기의 구조는 끊어졌다 이어지고, 현실과 꿈은 서로의 경계가 없이 얽혀 있다. 처음에는 이 영화가 나를 이해하지 못하게 한다고 화를? 냈지만 오늘 문득 깨닫게 되었다. 영화가 나를 방해한 것이라기보다, 내가 갖고 있던 영화에 대한 감각 자체를 다시 묻고 있었던 것.
우리는 대부분의 영화를 '이야기'로 이해한다. 이야기는 인물의 감정, 행동, 목표, 갈등, 해결 같은 흐름 속에서 전개된다. 이런 구조는 들뢰즈가 말한 '감각-운동 도식'에 가깝다. 목이 마르다는 감각 -> 시선을 물병에 두는 운동 -> 손을 뻗어 물병을 잡아 마시는 행위로 어떤 자극이 주어지면 인물이 지각하고, 반응하고, 문제를 해결한다.
이건 할리우드 영화의 기본 틀이기도 하다. 2차 대전 시기 유럽이 영화를 만들지 못할 때 할리우드에서는 공장식 영화를 찍어내 전 세계로 뿌렸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익숙하고 그만큼 잘 작동한다. 그런데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이 틀을 따르지 않는다. 인물의 정체가 분명하지 않고, 사건은 인과로 설명되지 않으며, 감정도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대신 이 영화는 시간 그 자체를 이미지로 만들고, 우리가 시간을 '느끼는 방식'을 낯설게 만든다.
들뢰즈는 "진짜 사유는 어떤 것과 불현듯 마주치는 데서 시작된다"라고 말한다. 이 마주침은 편안하지 않다. 기존의 지식이나 규칙이 통하지 않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생각하게 된다. 적어도 나에게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그런 마주침을 만들어낸다. 처음부터 끝까지 설명되지 않는 인물의 정체, 이해되지 않는 장면들, 누가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호한 구조. 이 영화는 관객이 해석할 수 없게 만들면서도, 그 모호함을 통해 새로운 방식으로 생각하게 만든다. 그것은 이해를 넘어서 감각을 움직이고, 감각을 통해 다시 사유로 이어진다.
들뢰즈는 이런 영화를 '시간 이미지의 영화'라 부른다. 기존의 영화들이 감정과 행동, 목적과 결과를 중심으로 재현해 온 것이라면, 시간 이미지의 영화는 그 도식에서 벗어난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그는 '탈영토화'라는 개념을 꺼내든다. 탈영토화란 익숙한 감각과 구조, 정체성의 틀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하나의 인물로 고정되지 않으며, 시간은 과거와 현재, 환상과 꿈이 섞여 접히고 겹쳐진다. 이야기의 흐름은 직선이 아니라 비틀린 나선처럼 전개된다. 그래서 어렵지만, 동시에 감각적으로도 압도적이다. 그것이 이 영화가 존재하는 방식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니 어려운 영화는 관객에게 시험에 들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감각을 다시 조율하게 만들기 위해, 기존의 해석 틀을 내려놓게 하기 위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유하게 하기 위해 어려워야만 한다.
들뢰즈의 말처럼, 사유란 무언가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해석 불가능한 것을 붙잡고 살아보려는 감각의 실천’이다.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바로 그런 실천의 예술이다. 그 안에는 정답 대신 충돌이 있고, 해석 대신 여백이 있으며, 감각의 분열 속에서 사유가 분만된다. 창조된다는 말보다 훨씬 더 생생하고 물리적 감각을 전달하는 표현이다.
예술이 정확하려고 할수록, 오히려 전달되기 어려워진다는 역설이 있다. 감정을 설명하는 대신 감각을 구성하려는 예술, 의미를 전달하는 대신 사유를 발생시키는 예술은 쉽게 감상되지 않는다.
고흐와 세잔의 차이가 그렇다.
고흐의 자화상은 불안과 광기가 그려진 그림이 아니라, 그 자체로 불안과 광기의 감각을 발생시키는 이미지다. 그래서 우리는 고흐를 상대적으로 쉽게 '이해'하는 것처럼 느낄 수 있다. 그는 여전히 인간 안에 있다. 반면 세잔의 사과는 감정의 표현이 아니다. 그것은 사과이기 이전에 사과로 느껴지는 무게, 색, 밀도, 감각적 구조 자체를 회화 위에 만들어낸 것이다. 세잔의 그림은 설명되지 않는다. 오히려 사과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제시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그 사과 앞에 서면, 우리는 그것을 보기 전에 느끼게 된다. 그것은 인간을 통해 왔지만, 더 이상 인간의 감각에 종속되어 있지 않다. 들뢰즈가 말하는 'percepts'란 바로 그런 것이다. 지각(perception)의 결과가 아니라, 감각의 조건을 구성하는 풍경.
『멀홀랜드 드라이브』 또한 그런 이미지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영화는 감정을 재현하지 않는다. 오히려 감각을 구성하고, 그 구성된 감각이 관객을 휘감는다. 쉽게 말할 수 없고, 정확히 정의할 수 없다.
정확함이 전달을 어렵게 만들고, 난해함이 오히려 감각을 열어주며, 바로 그 지점에서 예술과 철학은 서로를 필요로 한다. 영화는 결국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을 흔들고 세계를 다시 감각하게 만드는 경험 자체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프랑수아 트뤼포는 말했다. “메시지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우체국에 가서 전보를 쳐라.” 영화는 전달의 매체가 아니라 감각의 장치다. 설명보다 충돌을, 해석보다 여운을 남긴다.
어려운 영화는 관객의 해석 능력을 시험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사유가 가능하도록 감각을 불편하게 만들기 위해 존재한다. 들뢰즈의 말처럼, 사유는 평온한 이해가 아니라, 마주침과 충돌 속에서 시작된다. 영화가 우리에게 당황, 불쾌, 무능력, 파열을 안겨줄 때, 우리는 마침내 감각의 안락함을 벗어나 세계를 다시 구성할 수 있다.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나에게 그 파열의 가장 강력한 예시이고, 바로 그 점에서 이 영화는 진정한 철학적 영화이며, 사유의 기호를 방출하는 기계다.
내가 시네필을 자처했던 시절, 수없이 퍼부어졌던 난해하고 울렁증을 일으키던 영화들이 오늘 하루의 독서모임을 거쳐 돌연 고마움과 새로움으로 다가온다니. 철학이라는 느린 호흡 덕분에, 지금은 그 영화들이 단지 낯선 것이 아니라, 나를 낯설게 만드는 장치였다는 것 을 알게 되었다.
이지영 저자의 강의도 너무 좋았다고, 현장에서 하지 못한 말을 이곳에 남겨두고 싶다. 철학을 가까이하고, 계속해서 사유의 돌덩이를 마주하는 일—그건 어쩌면 이 팍팍한 인생을 감각하는 아주 즐거운 전투 아이템이 될지도 모른다는 기시감이, 강하게 들었다.
그래서 영화는 때로는 어려워야만 한다. 우리가 더 이상 예전 방식으로는 세상을 감각할 수 없을 때, 그 감각의 틀을 흔들어 주는 영화는 사유의 시작점이 된다.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바로 그 자리에서, 늘 나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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