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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는 배터리 2%에서 시작됐다.

비자발적 디지털 디톡스 소회

by JuneK

지구오락실 시즌3 초반 메인 콘텐츠는 디지털 디톡스다. 멤버 넷 모두 MZ라고 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영지와 유진은, 나영석과 이우정이 이미 PD와 작가로 한창 일할 때 태어난 세대다. 진짜 디지털 네이티브란 얘기다.


그런 그들에게 디톡스라니.



각자의 폰이 보이지만 만질 수 없는 '투명 감옥’에 들어가고, 감옥 문이 닫히자마자 멤버들은 이상(?) 행동을 하기 시작한다. 금단현상을 느끼는 것도 잠시 자기 스스로 콘텐츠가 된다. 서로를 인공지능으로 쓰며 검색한 콘텐츠를 재연한다. 그것으로 모자라 회의 중인 제작진을 붙들어 대화를 시도한다.


그 모습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너무나도 예상되는 괴로움.


오늘 나는 오전 일정을 마친 뒤 도서관으로 이동해 세무 처리와 자료 업로드를 할 계획이었다. 일반 서점에서 구매를 할 수 없어 도서관에서 찾아와야 하는 자료가 있었다.

점심 일정 때 예상보다 영상 촬영을 위해 핸드폰을 많이 쓰다 보니, 배터리가 금세 줄어들었다. 일정을 마치고 보니 핸드폰 배터리가 15%쯤 있었던 것 같다.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는 차로 이동을 하다 보니 배터리 챙기는 데에 소홀한 편이다.

일정이 늘어져 애매해진 데다, 자료 제출을 하기로 했던 공공기관 담당자가 전화가 왔다. 언제쯤 완료 가능한지를 물어 심리적인 압박이 생겼다.

하나라도 처리를 하자는 생각에 가까운 스벅에 들어가 먼저 자료 업로드를 하기 시작했다. 랩탑은 완충상태였지만 C to C 케이블이 없어 핸드폰 충전은 불가능했다. 스벅에서도 충전은 지원하지 않아 급히 일 처리부터 끝냈다.


부랴부랴 자료를 올리고 확인을 마치자 핸드폰엔 2%가 남아 있었다. (아마 영상 전송이 계속 진행되고 있었던 것 같다.)


2% 라니, 꺼진 것이나 다름없다.

나에게 지락실의 투명 감옥 대신, 완전한 종료가 선사되었다.


다시 발길을 돌려 집에 들를까 (진지하게) 고민했지만, 그럼 자료를 찾지도, 오늘 할당된 운동을 하지도 못하는 계획 모두가 틀어지는 상황이라 에라 모르겠다. 그냥 걷기 시작했다. 어차피 문헌정보실이 닫는 6시 전에 도서관에만 도착하면 되는 일.


평소 같으면 네비를 켜고 걷다 멈춰서 확인하고, 가장 효율적인 길을 검색해 걸었겠지만 그냥 감으로 걷기 시작했다. 큰길을 지나 어느 작은 골목으로 진입했는데 열려 있지만 닫힌, 미로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남산이 저 너머 보이는데, 길이 계속 돌고 돈다. 문득 불안감이 엄습해 확인할 겸 편의점에 들렀다.


“저기, 핸드폰이 꺼져서 그런데, 용산도서관 가려면 저 골목으로 올라가는 게 맞나요?”


카운터에 있던 모녀 중 따님이 핸드폰으로 검색해 대략 길을 알려주었다.

"후암시장까지 가서 한 번 더 물어보세요-"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에 카운터 앞에 놓인 견과류 한 봉지를 집어 계산했다.

다시 방향을 잡고 걷기 시작했다.


방향 확인으로 불안감을 잠재우고 나니 주변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처음 보는 좁은 골목길이었다.

약간의 자유를 맛보자, 더 과감해졌다.

길이 막히면 돌아 나오면 되지. 싶어 한두 골목 더 들어가 본다.

차도 못 다니는 좁은 일방통행 길에는 공예 샵, 작은 카페, 오래된 미용실이 이어졌다. 차가 못 다니는 길 앞으로 작은 화분들이 늘어서있다.


이상했다.

이런 정도의 해방감이 이렇게 대단한 줄 몰랐다. (직접 해보길 진심으로 추천한다. 머리로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르다. 주머니에 언제든 확인 가능한 핸드폰을 넣고 걷는 일과도 전혀 다른 경험이다.)


어디든 갈 수 있다는 자유, 단지 핸드폰이 꺼졌다는 이유 하나로 이렇게 강하게 느껴질 줄이야.


정처 없이 걷는다는 건, 목적지가 없는 게 아니라

처음 보는 것을 보고, 처음 느끼는 감각으로 반응하는 일이었다.


청학동스러운 가풍을 이어 온 집에서 자라 고3 수능이 끝난 뒤, 처음 핸드폰을 가졌던 나는 약속 장소에 먼저 가서 ‘언제든 오겠지’ 하며 책 한 권 들고 읽고 있던 때가 불과 20대 초반의 기억이다.


용산도서관은 꽤나 자주 다니던 익숙한 장소였음에도 늘 차나 버스로만 갔기에 내 기억 속 그곳은

‘남산길을 굽이돌아 나오는 5층짜리 건물’이었다. 그런데 오늘처럼 걸어 오르다 보니, 후암동 골목 끝에서 처음 보는 건물의 반대편과 마주쳤다. 회전 바람개비가 달린 울타리 너머의 입구. 같은 건물이지만 전혀 다른 인상이었다.


물론 핸드폰이 없었으니 그 장면을 담은 사진은 없다. ㅎㅎ

눈으로 담은 그 장면과 오르막길을 걸으며 약간의 근력 운동이 뿌듯한 날이다.


추가로! 며칠간 잡히지 않던 일의 실마리가, 그 길을 걷던 중 불쑥 떠올랐다. 뇌가 새로운 자극으로 기분이 좋아서였는지도 모르겠다.


2시간 남짓의 디지털 디톡스가 선사한 선물인 걸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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