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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촌놈, 첫 장거리 여행을 떠나다.

나를 마주하는 여행

by JuneK

며칠간 수면 부족, 장거리 운전 등으로 계속 몸이 깨어있으려는 회로를 돌리고 있다. 피곤하지만 잠에 들지는 못하는 과열상태에 시달리고 있는 것. 여행에서 복귀하자마자 집안 곳곳 내려앉은 먼지 정도만 빠르게 걷어내고 뜨겁게 물을 끓여 계속 몇 시간째 보이차를 마시고 있는데 발끝 손끝의 아릿한 느낌이 이제야 몸이 조금씩 순환되고 있는 느낌이 든다. 이번주에는 계속 내가 동의될 만큼의 마무리를 짓지 못한 채 쫓기 듯 글을 발행하면서 SNS에도 공유하지 않고 화두만 던져진 거친 글이 쌓이는 걸 보며 빚더미에 올라앉은 무거운 느낌이었다. 동기부여로 시작한 글쓰기 30일이 족쇄가 되는, 나에게는 꽤 익숙한 광경을 보고 있다. 결국 글쓰기도 ‘해야만 하는’ 상황에 끌려다니기 시작하니 흥미도 동력도 어느새 사라져 가고 있나 보다. 익숙한 자구책이지만 역시나 지속가능하지는 않음을 안다.
오늘 아침, 일출을 보고 잠시 쉬다가 승효상 건축가가 사유원(*조만간 이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긴 글을 통해 차분히 전하고 싶다. coming soon!)에 지은 여러 공간들 중 가가빈빈이라는 카페에서 미리 챙겨간 그의 저서 <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를 읽었다. 혹시나 읽을 수 있는 순간이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 출발 전에 급하게 새벽배송으로 받은 책을 포장만 겨우 뜯어 집어 온 건데, 결과적으로는 이번 여행을 위해 내가 한 여러 일 중 가장 칭찬하고 싶은 일이 되었다. 저자가 창조해 낸 공간에서 그의 책을 읽고 있으니 그의 음성이 귓가에 들리는 듯 생생했다. 오늘 읽은 챕터 중 현장의 힘을 강조하는 부분이 있었다. 모든 진실은 현장에서 확인된다고 말하는 그는 그렇기 때문에 매번 현장으로 떠난다고 했다. 그걸 여행이라는 말로 부른다면 자신은 여행을 좋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 공간, 그 현장을 직접 만나고 그 삶이 관계 맺는 모든 상황에 대한 관찰을 하면서 비로소 그 건축이 삶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느낄 수 있는 것이라고.
오늘 그의 글과 공간을 만나게 된 건 나에게도 아주 큰 의미가 있다. 여러 가지 이유들로 이번 달에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예정에 없던 차 교체를 하게 되었는데 공교롭게도 되도록 많이 떠나고, 많이 경험하라는 그의 글을 읽으니 용기가 났던 것이다. 지금 타는 차를 산 이후로 오늘 주행거리가 가장 길었다. 사실 서울 촌놈이라 지방에 대해 잘 아는 바가 없어 어딜 떠나고 싶어도 친구나 연고가 없기도 하고 궁리를 해봐도 강원도 인근 1-2시간 이내의 거리 정도가 생각이 겨우 미치는 수준이다. 그러다 보니 본격적으로 떠나지 못하는 이유도 있고, 한편으로는 부러 떠나고, 또 바깥 공간에서 낯설게 잠이 드는 일을 좋아하지 않다 보니 내 삶의 반경은 좁은 편이라고 해야겠다.('잠은 집에서 자야지.'라는 고루한 생각을 하고 산다.) 어제오늘 합쳐 왕복 600킬로 남짓을 달렸는데, 겁냈던 것 치고는 나쁘지 않았다.(아마도 자율주행이 한몫했을 것이다.) 문득 길 위의 달라진 풍경을 보고, 막히는 길 위에서는 멍하니 서 있기도 했다. 크게 노래를 부르거나 혼잣말을 지껄이기도 하면서. 그렇게 오가는 시간 속에 내 머릿속도 채워지고 비워지기를 반복했다. 집에 도착해 여행지에서 입었던 옷가지를 빨고 차를 한잔 내려 마시며 문득 이런 시간이 앞으로 얼마간 나에게 더 있기를, 더 많아지기를 바랐다. 누구와 동행하지 않아도 내가 나와 함께 든든히 지낼 수 있는 시간, 내 옆자리에 나를 가장 많이 두는 시간, 나와 가장 친해지는 시간을 바랐다.

그래서 결론은 대책 없이 큰 차를 계약한 나의 결정을 정당화하면서도 얼마간은 언제든 불현듯 훌쩍 떠날 수 있다는 예고편인 것이다. 꽤나 그럴듯한 핑계다.

자꾸만 꾀만 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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