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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든 지든 러너에겐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전업 작가가 들려주는 '달리는 일'의 힘 그리고 삶의 태도

by JuneK


독서의 큰 장점 중 하나는, 저자가 영향받은 또 다른 책을 추천받게 된다는 점이다. 그의 취향을 알 수 있고 어떤 이의 책이 어떤 것에 영감을 받게 되었는지, 자연스레 그 길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보는 재미도 있다. 성공률의 측면에서 본다면 어쩌면 S대 필독서 리스트 보다도 더 유효하다. 이것은 취향의 길을 따르는 일이니 거의 실패가 없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도 그렇게 만나게 된 책이다.

이 책을 읽지 않았을 때도 무라카미 하루키가 매일 달린다는 것, 굉장히 정확한 루틴을 매일 실천한다는 것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이 책을 읽어보면 '아 이 사람, 달리는 것에 진심이구나.'를 더욱 깊이 느낄 수 있다. 언뜻 책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그의 달리기 경험이 단순히 서술되어 있는 것을 넘어서서 글자들이 튀어올라 내 옆에서 뛰고 있는 그의 땀방울이 내 뺨에 느껴질 만큼의 거리감으로 생생히 묘사되어 있다. 이 생생함 때문에라도 '이 책은 역시 달리기를 깊이 사랑하는 사람의 애정을 느끼게 되는 내용이군.' 하며 마무리할 수도 있지만, 잠깐 숨을 고르고 다시 새롭게 보면 많은 구절이 우리가 삶을 대하는 태도로 해석해도 전혀 무리 없을 정도로 모든 표현이 은유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런 인상을 받은 구절들은 너무 많아 밑줄 투성이지만 대략 앞부분을 발췌해 본다면 이렇다.


끝까지 달리고 나서 자신에 대한 자부심(혹은 프라이드와 비슷한 것)을 가질 수 있는가 없는가, 그것이 장거리 러너에게 있어서의 중요한 기준이 된다.
어제의 자신이 지닌 약점을 조금이라도 극복해 가는 것, 그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장거리 달리기에 있어서 이겨내야 할 상대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과거의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달리고 있는 동안은 누구와도 얘기하지 않아도 괜찮고, 누구의 얘기도 듣지 않아도 된다. 그저 주위의 풍경을 바라보고, 자기 자신을 응시하면 되는 것이다.
시간은 정해진 만큼의 몫을 받아간다. 누구의 탓도 아니다. 그것이 게임의 법칙인 것이다.


특히 자신을 다독이는 구절에서는 그 논리가 탄복할 수준의 합당함이라 거절할 수 없는 제안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나는 "오늘은 달리고 싶지 않은데" 하고 생각했을 때는 항상 나 자신에게 이렇게 묻곤 한다. 너는 일단 소설가로서 생활하고 있고, 네가 하고 싶은 시간에 집에서 혼자서 일을 할 수 있으니, 만원 전철에 흔들리면서 아침저녁으로 통근할 필요도 없고 따분한 회의에 참석할 필요도 없다. 그건 행운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런 일에 비하면 근처를 1시간 달리는 정도는 아무 일도 아니지 않은가? 만원 전철과 회의의 광경을 떠올리면 나는 다시 한번 스스로의 의지를 북돋아 러닝슈즈의 끈을 고쳐 매고 비교적 매끈하게 달려 나갈 수 있다.


'달리는 일'을 '명상'이라는 단어로 치환하면 매일 아침, 내가 나에게 타이르는 말과 다르지 않다. 나를 무시하거나 깔아내려 채찍질을 하는 말하기가 아닌, 우선 나의 현재를 돌봐주고 왜 뛰어도 괜찮은지 찬찬히 알아듣게 설명해 주는 것이다. 나는 언제든 나에게 이렇게 다정해준 적이 있었던가?

지난봄에 이 책을 만나고 꾸준히 달리기 시작했다.(물론 2주간은 비가 오고 과중한 업무로 쉬었다. 그래서 그런지 다시 몸이 붓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 시작할 무렵이 일교차가 심했던 터라 얼마간은 콜린성 두드러기에 시달렸으나 곧 괜찮아지더니 나 스스로 땅바닥을 지치며 기운을 내어 말 그대로 내달릴 때도 있었고, 천근만근 같은 두 다리를 이끌고 겨우 걷듯 뛰는 날도 있었다. 그래도 여전히 시계가 하루의 끝을 향해 달리는 10시 11시 사이엔 어김없이 아식스 조그 신발끈을 말없이 조여매고 현관문을 나서게 되는 건 뭔가 계속 이끌리고 있기 때문이겠지. 그래도 그가 바라던 묘비명의 구절처럼 '적어도 걷지는 않았다'를 실천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그런 애쓴 나를 대견해하기도 하며 절뚝거리는 나라도 좋으니, 다독이며 오늘 하루도 함께 잘 걸어가고 있다. 주변과 비교하고 경쟁하기보다는 어제의 나보다 조금 더 달릴 수 있는지, 나의 호흡은 어떤지, 나의 몸은? 스쳐가는 풍경은 안녕한지, 지금에 좀 더 머물러 보기를 바라게 된다. 그런 삶이 모여 단단한 기반이 되고, 다시 내일을 살 수 있는 힘이 된다고 믿고 싶다.
나보다 앞서 뛰고 있는 그가 보여주는 꾸준함에 대한 굳건한 믿음, 그 과정에서 몸이 전해주는 메시지, 달리며 비우는 생각, 그 비워진 자리를 다시 자유롭게 채워나가는 여유를 나 역시 가지게 되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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