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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eK Jul 09.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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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도 청정구역이 있나요?

 아주 고된 연애 이후 자주 가던 동네에 한동안 오도 가도 못한 경험이 있다. 어린 시절이었고, 온통 가는 곳마다 지뢰밭이었기 때문에 몹시 괴로웠다. 물론 그런 경험도 거듭될수록 그 괴로움마저 무뎌진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본능적으로 그곳은 꼭 수호해야겠단 생각을 언제부터 했던 걸까?

 연애라는 것은 나의 세계를 기꺼이 전부 열어 보여주는 것이라고 믿었던 때가 있다.(지금은 생각이 바뀌었지만) 내가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우선하는지, 무엇에 취약하고 때로 어떤 부분은 놀랍도록 허술한지에 대해 부끄러운 줄 모르고 떠들던 시절이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았다. 이젠 그런 수고를 부러 하진 않는다. 굉장한 에너지가 필요한 일임을 알고 있다.


 크게 산능성이를 돌아 내려와, 중국식 수제만두를 빚어내는 집을 마주 보고 좌회전하면 오른편으로 찬란한 야경이 펼쳐지는 나의 아지트가 있었다. 나는 그 길을 마포대교-강변북로 진입 도로 보다도, 두무개 다리보다도 애정한다. 뚜벅이 시절에 내 두 발 디뎌 직접 찾았던 곳이기도 하고, 그곳에서 나는 늘 나와 대화를 나눴다. 잘하고 있다던가, 너는 누군지, 네가 진짜 좋아하는 게 뭔지 잘 생각해 보라던가 주로 나를 다독이는 말을 많이 해주었다. 뜻 모를 공허함이 마음을 뒤덮는 날에는 엉엉 소리 내어 울며 걸어도 아무도 들을 일 없는 길이기도 했다. 약간의 경사가 보폭을 조금 더 크고 씩씩하게 만들어주기도 했다. 길의 끄트머리쯤을 가면 나타나는 고즈넉하게 자리 잡은 주택들을 보며 이곳 어딘가에 작은 작업실과 중정이 있는 주택을 짓고 산다면 좋겠다는 꿈을 꾸기도 했다. 나를 다독이기도, 내가 지껄이는 말들을 흡음재처럼 들이마셔주기도 한 이곳은 언제라도 또 도망쳐 올 수 있도록 누구와의 추억도 만들지 말고 늘 나와의 공간으로 남겨두자.라는 마음이 들던 곳이다.


 이성보다 감성이 앞서는 순간이 누구에게나 있다. 지나치게 확신하는 순간도 있다. 그 시절의 나는 평생을 헤매다 드디어 더 이상 나만의 아지트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었고 그 생각에 한 치의 의심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의 청정구역은 그 순간 새롭고 소중한 추억을 하나 더하게 되었다. 동시에 유일하게 남은 청정구역이 사라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오늘 야간 등반을 마치고 내려오는 길에 두 갈래 길에서 우회전 깜빡이를 켜고 서 있는데 문득 바닥에 적힌 '북악스카이' 글자가 보여 '서두를 이유가 없으니 드라이브를 해보자.' 하고 잠시 멈춰 좌회전을 해 돌아 내려가기 시작했는데, 그때 까지도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보다는 뒤로 따라붙은 택배차량을 먼저 보내주고 싶다는 마음에 신경 쓰며 운전했다. 나는 그저 풀냄새를 맡으며 느릿느릿 가고 싶을 뿐인데, 폐 끼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길이 옴팍 잠시 넓어지는 구간에서 먼저 트럭을 보내주고는, 다시 느릿느릿 내려가다 길 끝에 대로변과 만나는 지점을 확인하고 나서야 '아, 여기 거기네.'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이 순간이다. 청정구역에는 없을 순간. 어떤 기억에 순간 점령당하고 마는.


 색깔 중 고르라면…시원한 파란색이 입혀진 그 공간을 지나 내려오며 엷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것도 다 나다. 그럴 수도 있지 뭐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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