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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eK Jul 10. 2023

과습, 둔감하고 나태한 사랑

호접난 긴급 구출기

 부친은 때마다 식물을 보낸다. 주로 날짜가 맞지 않는 플러스 마이너스 일주일 내외의 생일 즈음인 경우가 많다. 음력으로 계산을 한다기에는 매해 기억하는 날짜가 다르지만 별로 중요하지 않다. 뭘 받는다는 게 어딘가.


근데 왜 대관절 식물인가?



 몇 해 겪고 나니 아무래도 화분에 동봉되는 알록달록 리본에 남의 입을 빌려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어서가 아닐까 추측하게 되었다. 어쩌면 뭉툭한 아버지가 자식에게 시도하는 나름의 방편이 아닌가 한다.


 나도 종종 손쉽게 집들이 선물로 식물을 생각하게 하지만 나조차 고려하지 못했던 받는 자에게 남겨지는 문제는 '올바른 반려 식물 양육'이라는 부담스러운 과제다.


 여인초같이 비교적 쉬운 친구들을 받을 때는 별 부담 없이 지켜보며 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푸른 잎을 즐기며 잘 키웠는데, 몇 해 전부터 오기 시작한 호접난은 그 난이도가 높아 마음이 영 불편했다.


그나마 오래 사는 여인초


이미 흙으로 돌아가신 1대 호접난


자결로써 나의 무책임한 돌봄에 대해 적극적으로 항의 중인 붉은 호접난



호접난, 그 이름도 화려한 난. 호접난(胡蝶蘭)은 태국 미얀마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가 원산지인 난초로 학명은 팔레놉시스(Phalaenopsis)라고 한다. 국내에선 꽃이 활짝 핀 모습이 나비를 닮았다고 해서 나비 접(蝶) 자를 이름에 붙였다고. 물론 호접난은 이름처럼 싱싱하고 우아한 상태로 도착한다. 얼마가지 않아 비극의 서막을 알려오는데, 처연하다 못해 무시무시하게 자결하듯 봉오리 지어 애써 피운 꽃대가리를 바닥에 처박으며 호접난의 난은 시작된다. 당황하기 시작한 나는 물을 더 주고, 괜히 지나가다 분무기질을 한번 더 해본다. 맞다. 여기서부터 뭔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하고 오며 가며 자결한 꽃무더기들을 주워 쓰레기봉투로 넣는 것 밖에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생각하고 포기하게 되는 것.


 하지만 이번 것은 한 달도 못살고 연쇄자결을 하는 그 모양이 마치 사건 현장 같다. 유독 잎이 붉어서 그런지 내 불편한 마음의 반영인지, 왠지 꿈에 나와 파리지옥처럼 나를 잡아먹을 것만 같은 공포로 다가와 나는 밀려오는 죄책감에 뭐라도 해보기로 했다. '호접난 살리는 방법'으로 검색하자 여러 영상이 있었고 두세 개 보고 나니 문제는 다름 아닌 "과습" 임을 알게 되었다. 뿌리가 채 마르기도 전에 물을 부어주고 부어주고, 넘치는 수분을 감당할 수 없는 뿌리는 무르고 썩어 녹기 시작하고 결국은 모든 뿌리를 잃어갈 때쯤엔 모든 꽃이 지고 끝나는 수순이었다. 황망한 마음으로 뿌리를 씻어내고 물러진 뿌리를 잘라내어 말렸다.


꽤 속이 시원한 모양새, 부디 말려 죽이지 말기를


지금 할 수 있는 솔루션은 뿌리를 건강하게 말려 수경재배를 시도해 보는 것이다. 나는 호접난에 대해 알고 싶지도, 알려고 하지도 않은 채 무책임하게 물만 부어주었던 것.


적어도 말려 죽이지는 않았노라고. 최소한의 변명을 하고 싶었던 걸까.


말려 죽이는 일보다 과습으로 죽이는 일이 더 나쁘다. 사랑을 주지 않으면 단념이라도 할 텐데, 원하지 않는 때에 원하지도 않는 방식으로 사랑을 덮어놓고 퍼부으니 곪거나 썩고 그 상황을 알릴 새도 없이 죽어 없어질밖에.


이번에는 꼭 부활을 성공시켜 볼 요량이다. 모든 것이 세심한 관심이 필요하다. 그러기에 내가 부족할 뿐.


p.s. 이역만리 천조국에서 다정하게 콘텐츠를 만들어주신 정원지기 유튜버님께 감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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