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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eK Jul 12. 2023

묵 말려 먹는 못 말리는 여자

절밥 입맛으로 속세 사는 사람 여기 있습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식성이 어린이 답지 않게 나물 반찬을 좋아했다. 말린 호박볶음, 가지무침, 취나물, 마늘쫑 장아찌 같은 걸로 한가득 나오는 시골밥상이 좋았다. 친할머니는 주로 육고기, 생선 같이 일품 메인 요리에 신경을 쓰셨는데, 절에만 가면 오색찬란 각종 이름도 희귀한 나물반찬들이 잔뜩 나와서 절밥 노래를 불렀었다.

 언젠가 무슨 행사가 있어 북한산 중턱 외진 곳 절에 갔다가 그때 먹은 절밥이 너무 맛있어서 스님한테 여기 살아도 되냐고 했다가 그 소리를 들은 온 가족이 벙 찐 기억이 있다. 과장 조금 보태면 아직도 그 밥 맛이 기억날 정도다.


 워낙 소화가 느려 뭘 먹는 게 부담스럽고 밥 먹어라 소리를 제일 귀찮아하고 초콜릿만 찾던 어린이가 뭘 좋아한다고 하니, 근데 그게 절밥이라고 하니 다들 놀랠 만도 했다.


 이 어린이는 커서 상해로 건너가 얼마 간 외노자 생활을 하게 되는데 그 식성을 참지 못하고 급기야 도토리묵을 사다가 집안에서 말리기 시작한다. 왜 그곳에서 갑자기 하필 묵말랭이가 먹고 싶었는지, 왜 묵말랭이를 안 사고 굳이 도토리묵을 사다가 말렸는지 모든 것이 미스터리지만. 다 마신 우유팩을 잘라 평평하게 만들고 그 위에 길게 깍둑 썬 묵을 가지런히 놓아 말렸다. 지금 생각하면 자칫 잘못 관리되어 상했을 수도 있는데, 용케 배탈은 안 났다. (얼른 먹고싶은데 생각보다 묵이 잘 안말라서) 어설피 마른 묵을 씻어내고, 양파, 당근, 공심채 같은 채소를 간장 양념에 달달 볶다가 씻어놓은 묵을 넣고 한번 더 센 불로 볶아내고 깨를 솔솔 뿌리면 끝이었다. 별 맛도 아니었는데. 먹을 때마다 실패가 없는 음식이었다. 궁중떡볶이 같기도 하고, 옅은 가지볶음 양념 맛에 더 식감이 살아있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입 안에서 말린 묵을 이리저리 돌돌 돌려가며 씹는 재미가 있었다.


 한국에 돌아온 뒤로는 가끔 간편하게 묵말랭이를 사다가 불려 두고 볶아 먹기도 하는데, 그때 그 맛이 잘 나지 않아 아쉽다. 아무래도 모든 음식이 정성인 것 같다. 나 스스로를 먹여 살리자고 그런 정성을 들였던 지난 시간을 돌아보니 웃기기도 대견하기도 하다.


 부모님이 물려주신 다양한 유산 중 음식을 만들어 먹는 즐거움을 아는 사람으로 성장한 일은 유독 감사한 부분이다. 모든 과정이 정교하고 세심하지는 않지만 뭐든 요리를 만들고 누군가에게 밥을 지어주는 일의 행복을 안다. 그런 마음이 드는 때가 있다. 매번 매일같이 하는 상황이 온다면 어떨지 자신 없지만, 정말 아끼는 사람에게는 무엇보다도 밥을 지어 먹이고 싶은 생각이 든다. 돌아보니 그랬던 것 같다. 이 마음을 알게 되니 누가 밥을 차려주면 그렇게 눈물날만큼 고맙다. 이걸 그때도 알았다면 내가 엄마 밥을 남기지는 않았을 거다. 묵말랭이 타령을 하다 보니 엄마 밥이 먹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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