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마음을 먹고 착하게 살아야지 , 의식의 흐름대로주저리주저리
처음 호두까기 인형 발레를 보던 날의 감동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시작되고 서서히 막이 열렸다. 함박눈이 마을을 포근하게 뒤덮어주고 거리 곳곳에는 크리스마스의 설렘을 만끽하는 아이들이 가득하다. 빨간 망토를 입은 아이들, 저녁 만찬을 즐긴 한껏 들뜬 부부, 어디론가 짐을 싸 먼 길을 떠나는 행인들. 저마다 역할을 연기하는 무용수들의 몸과 몸짓이 너무 아름다워서, 음악이 너무 아름다워서, 그리고 그들이 있는 동화 속 장면이 너무 아름다워서 가슴 깊이 벅차올랐다. 한 명 한 명의 몸짓과 표정을 더 자세히 그리고 더 오랫동안 보고 눈에 담고 싶은데 장면이 계속 전환되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발레는 사실 참 뻔하다. 차이코프스키를 비롯한 몇 안 되는 작곡가, 그들의 클래식 발레 음악 그리고 몇 안 되는 안무가와 그들의 안무. 어떤 콩쿠르는 같은 학교에서 참가하는 학생들이 모두 동일한 작품을 들고 나오기도 한다. 같은 의상에 같은 음악, 같은 안무인데도 학생들 저마다의 느낌이 참 다르다. 어떻게 보면 작품의 완성도의 차이가 크다고도 할 수 있다. 어떤 참가자의 2~3분 남짓되는 경연은 마치 한 편의 전막 공연을 보는 것 같은 감동을 주기도 한다. 정형화된 플랫폼 안에서 무용수의 표정과 몸짓 신체가 차이를 만들어주고 관객에게 재미와 감동의 요소가 된다는 점이, 발레의 뻔하지만 뻔하지 않은 매력인 것 같다.
무용수가 만들어내는 재미와 감동은 뜻밖에도 굉장히 체계적이고 계산적이고 훈련된 것이다. 아마 예술에서의 보편적인 감동은 이상향에 가까운 신체와 동작의 완성도에서 나오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린 시절부터 오랜 기간 동안 이어진 혹독한 훈련과 자기 관리가 준 아름다운 신체, 그리고 정확한 동작을 위해 머리끝부터 발끝, 그리고 시선과 표정까지 온몸을 신경 쓰고 통제하는 모습이 경이롭다. 그런 모든 틀이 갖추어진 후에 본인만의 개성이 들어가고 그것이 재미와 감동으로 이어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제 우연히 내가 좋아하는 무용수의 인터뷰 영상을 봤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잘할 수 있냐는 뻔한 질문에 그녀는 성실성과 착한 마음을 거듭 강조했다. 발레는 정말 나쁜 마음을 먹은 사람은 할 수 없는 거라고. 그 사람의 성격이 춤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고. 뭐 꼭 착한 사람만 성공하나, 뭘 저렇게 착한 걸 강조하나 싶다가, 문득 피겨스케이팅 선수 캐롤라인 장을 떠올리며 정말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캐롤라인은 주니어 시절 좋은 성과를 내며 미셸 콴을 이을 미국의 유망주로 꼽혔다. 하지만 점차 나이가 들며 유망주 대열에서 점차 이름이 사라졌다. 그녀는 점프를 하기 위해 턴을 한 뒤 한쪽 다리를 과도하게 높이 들어 올렸다 내리찍는 힘을 이용해 점프를 하곤 했는데, 체격이 작고 가볍던 주니어 시절에는 성공률이 높았지만 점차 성장에 따라 변화하는 체형에는 그 점프가 맞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그녀는 오랜 노력 끝에 점프 교정에 성공하였고 전성기 시절의 명성은 되찾지 못했지만 그녀의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그녀가 정도의 길을 가지 않고 요령만을 터득하다 생긴 일이라고 치부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몸에 익은 습관은 쉽사리 고치기 힘들고 잘못된 버릇은 쌓이고 시간이 흐르다 보면 분명 좋지 않은 결과로 귀결되는 것 같다.
무대 위의 무용수는 얼마나 착하고 성실해야 할지 도무지 상상조차 안된다. 조명 아래 얇은 레오타드만 입고 설 수 있기까지 먹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을 얼마나 참아 왔을지. 이상향에 가까운 자세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오랜 기간 수련했을지. 전굴 자세를 할 때면 구부정한 내 등허리도 이젠 진짜 교정이 필요할 때인 것 같다. 지금 정도 수준의 동작을 당분간은 하기 힘들더라도 바른 자세를 유지하도록 처음부터 노력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