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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현 Aug 26. 2021

스물 다섯, 제주도

03. 제주는 '인연이 연인이 된 곳' 이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예상치 못한 순간에, 사랑은 그렇게.


나에게 연애는 사실, 나와는 조금 동떨어진 무언가와도 같은 것이었다.

첫번째로 일단 이성적으로 외로움을 잘 타지 않는 성격이고, 

둘째는 내가 좋아하더라도 상황이 맞지 않으면 연애하지 않는 현실주의자이며, 

셋째는 "사랑이 그렇게 쉬워?"를 외치며 내가 좋아하지 않으면 절대 고백은 사절인 철벽녀였기 때문이다. 


그 시절에 주변 연애를 하는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기억이 있다.

"연애는 원래 연애에 대한 생각이 없을 때, 갑자기 하게 된다?"


연애에 대한 생각이 없는데, 연애를 왜 해...? 글쎄, 내가 좋아하는 마음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나기는 할까...? 내가 좋아하더라도 서로 동시에 서로를 좋아한다는 그 기적과도 같은 일이 나에게 일어날까...?

 

그런데, 어쩌면 정말 그렇다는 걸, 제주도에서 직접 겪에 되었다. 

연애에 대한 생각이 정말 없었던 내가, 정신을 차려보니 제주도에서 남자친구가 생겼다. 

남자친구는 정말 예상치도 못한 순간,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만났다. 내가 스물 다섯살에 제주도에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안했을 뿐더러, 제주도 카페에서 일을 하게 될 것이라고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런데, 제주도 카페에서 일하며 남자친구를 만나게 되었으니... 


이건 어쩌면 ‘나답지 않은 일’이었다. 내 주변 사람들이 알게 된다면, 너가? 너가 그렇게 연애를 시작했다고? 할 정도로 말이다. 


남자친구 첫인상은 숙취에 하얗게 질린 얼굴의 모습이었다. 나름 하얀 피부를 가진 나보다도 더 하얀 남자.

공장 같이 돌아가는 대형 카페 가장 바쁜 시간 대, 그 정신 없는 상황 속에서 자신이 도와줘야하는데 숙취가 너무 심해 제대로 도와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이 그가 나에게 처음 건넨 말이었다. 

어쩌면 인연이라는 게 있는건지, 그때의 나는 일을 시작한지 이틀째 되는 날이라 적응도 채 하지 못했을 뿐더러 너무 정신 없이 바빴기 때문에 '이 사람 뭐지?' 하고 화가 났을 수도 있었는데 참 이상하지. 

저렇게 잔뜩 미안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이 도와주지 못하는 걸 진심으로 사과하는 모습이 매너있다고 느꼈다.  

파트타이머라 음료 제조는 하지 못하는 나에게 출근하면 음료 뭐 마실지 가장 먼저 물어봐줬고, 조금 한가한 시간에는 내게 말을 걸어줬다. 짧은 시간 나눈 대화였지만 제주도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가 같고, 좋아하는 날씨가 같고, 취향이 비슷하고, 삶의 가치관이 비슷하고, 중요하게 여기는 덕목이 비슷하고, 왠지 모르게 무드(mood)가 그리고 얼굴의 인상이 비슷한 사람이었다. 그래서였을까, 굳이 지금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다시 만나게 될 것만 같다는 느낌이 든 사람이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사람의 촉이라는 게, 사람의 그 직감이라는 게 참 무서운 거구나 싶다. 



그렇게 좋은 오빠 동생 사이로 시간이 안맞아 밥 한 번 못 먹고 지내던 어느 날, 휴무일이었던 오빠가 시내에 나갔다가 기숙사로 들어가는 길이니 나를 태워가도 될 것 같다는 연락이 왔다. 

그리고 나는 그날 그 차를 탔다. 


그날 이후 오빠는 내가 저녁 약속이 있으면 본인이 퇴근 한 후에 차로 나를 집까지 태워다 주기도, 자기 출근이 늦는 날에는 기숙사가 멀지 않아 걸어서 출근해도 될 거리를 굳이 차로 15분 거리에 사는 나를 데리러 왔다가 다시 돌아가 출근하기도 했다. 

같이 출근하는 날이면 젤리나 음료수를 사줬고, 당시에 급성축농증으로 고생하던 나에게 따뜻한 꿀물이나 목캔디를 선물로 주기도 했다. 또 일하는 내내 내가 마시는 티가 식지 않도록 뜨거운 물을 조금씩 부어주기도 했다.(나는 이게 왜 안 식고 계속 따뜻하지..? 싶었다가 나중에야 알았다ㅋㅋㅋ)

나는 직감했다. 이러다가 연애를 하게 될 것만 같다고 말이다. 오빠가 고백만 하면 말이다.(나는 태어나서 고백을 한 번도 하지 못한 쫄보이기에...)


그러다 함께 휴무일이 겹치는 날, 오빠와 영화를 보게 되었다. 

영화관에는 사람이 정말 없었고, 그날도 역시 나는 급성축농증으로 고생 중이었다. 역시나 영화를 보던 도중 갑자기 기침이 막 나오기 시작했고, 오빠는 자기 자켓을 내 몸쪽으로 덮어주더니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상영관을 나갔다. 사실 좀 당황했지만, 쏟아져 나오는 기침을 참느라 돌아볼 겨를도 없었다. 금방 돌아온 오빠의 한 손에는 생수 한 병이 들려있었다. 보통 파는 시원한 물이 아니라, 냉장고 밖에 꺼내져있던 미지근한 물이었다. 나는 그 날 이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구나를 확신했다.


그날 저녁을 먹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밤 드라이브를 하며 오빠는 나에 대한 마음을 솔직하게 이야기 해줬다. 같은 공간에서 일을 하다보니까 호감 표현을 적극적으로 하는 게 너무 이기적인 행동같아서 많이 망설였는데 이대로 표현하지 못하면 후회할 것 같아 어떤 식으로 표현을 해야 할 지 고민을 한참을 했다고 했다. 


며칠 뒤에 오빠는 집 앞에 와서 나에게 사귀자고 고백했다.

그 과정에서 나는 나에 대해 더 잘 알게 되었는데, 나는 생각보다 내숭이 없는 여자였고, 무언가 결심하고 결정을 내리면 재고 따지는 걸 안하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고백을 받았을 때, 단 1초만에 예쓰를 해서 오히려 고백한 사람들 당황 시킬 수도 있는 여자라는 걸 알게 되었다.(생각 좀 해본다고 할 걸...ㅎㅋㅋ)

여전히 우리는 점점 더 서로가 좋아지는 연애를 진행 중이고, 시간이 잘 맞지 않음에도 틈틈이 만나 제주도 데이트를 하고 있는 중이다. 서로를 알아가고, 적응하고, 받아들이는 연애 극초반을 지나가고 있고, 어쩌면 미래를 생각해 볼 수 도 있는 진지한 관계가 되어가는 중이라는 게 느껴져 좋다.


참 신기하지. 내가 아는 나란 사람이 제주도에서, 그것도 일하는 곳에서 연애를 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역시 세상에는 아무것도 장담할 수 있는 건 없다는 걸 느낀 순간이었다.


연애는 정말 연애에 대한 생각이 정말 없을 때, 예상치 못한 순간, 예상치 못한 곳에서, 예상치 못한 사람과 하게 된다는 것 말이 괜히 있는 말도 아니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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