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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관계의 동심원을 나를 중심으로 그리다

생존을 기준으로 인간 관계를 나눠봤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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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alook.so/posts/XBtoWOV


- 글을 쓰게 된 목적 : 


인간 관계가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믿었던 친구에게 배신당하거나, 인간 관계에서 회의감을 느끼게 될 때 주로 그렇다. 그렇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금 새롭게 인간 관계를 맺게 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인간 관계를 맺는 것이 생존본능에 따라 작동하는 게 아닐까 싶다. 즉, [의식주]가 해결된다고 해서 생존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관계맺기]까지도 생존을 위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인간 관계를 가족, 친구, 지인으로 나누고 각각 본능적 생존, 감정적 생존, 이성적 생존으로 대응시켜 보았다. 물론 인간 관계는 얼마든지 변화할 여지가 있기에 천편일률적으로 대응할 수 없다. 다만, 우리는 중요도에 따라 인간 관계를 [가족/친구/지인]으로 나눠서 관리한다는 점, 관계를 맺는 이유는 생존과 직결되기 때문이라는 점, 온전한 가족 구성원을 만나기 위해 그토록 많은 친구와 지인을 만난다는 점, 가족이라고 해서 모든 감정을 온전히 소통할 수 있지 않다는 점, 가족에게는 육체적 생존만 요구할 수 있다는 점, 아무리 친구라도 모든 감정적 생존을 보장할 수는 없다는 점, 인간 관계에 회의가 들 때는 핵심 관계부터 순차적으로 점검해보는 게 필요하다는 점 등을 짚어볼 수 있게 된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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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관계의 동심원을 나를 중심으로 그리다




https://alook.so/posts/mbtEwn7


0.

인간 관계의 원칙을

다시 요약해 본다면


지난 글에서 인간 관계에 원칙이 있느냐는 주제로 이야기했었는데,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사람마다 인간 관계에 쏟을 수 있는 에너지 총량은 유한하다.
2. 다시 보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에너지를 쏟는 인간 관계가 중요하다.
3. 에너지 총량 안에서 다시 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관계는 다다익선이다.


결국 개인이 소화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인간 관계는 한정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자신이 소화할 수 있는 에너지 총량이 1000인데, 다시 보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쏟을 수 있는 최소한의 에너지가 10이라면, 자신이 소화할 수 있는 인간관계는 최대 100명까지겠죠.


하지만 실제로 모든 사람에게 최소한의 에너지를 쓰는 건 아닐 겁니다. 그러니 자신이 소화할 수 있는 인간관계는 절반 정도로 잡아보면 50명 정도가 될 겁니다. 그 50명은 시간이 지나면서 얼마나 자주 연락하고 지내느냐에 따라 계속 바뀔 테고요. 영원한 건 절대 없으니까 말입니다.




1.

인간 관계의 동심원을

나를 중심으로 그리다



관계의 동심원


이제 세 개의 동심원을 살펴봅시다. 동심원의 중심에는 [내]가 존재하고, 중요도에 따라 나를 둘러싼 인간관계가 만들어집니다. 세 개의 동심원은 각각 [본능], [감정], [이성]을 상징하는데요. 이것을 뇌의 관점으로 보면, 각각 파충류의 뇌인 [뇌간], 포유류의 뇌인 [변연계], 영장류의 뇌인 [전두엽]에 대응될 수 있습니다. 인간 관계와 대응시킨다면, 각각 [가족], [친구], [지인]과 연결됩니다.


매사에 기초가 가장 중요하듯, 가장 내부에 있는 인간 관계인 [가족]은 모든 인간 관계의 기초이자 근본이 됩니다. 어린이가 부모의 지원이 없으면 생존할 수 없습니다. 미우나 고우나 가족은 적어도 태어나서 청소년기까지 동안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합니다. 가족과의 관계에서 안정감을 누리지 못하면, 사회생활에서 원활하지 못한 면이 드러나곤 하는데요.


완벽한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기에 누구나 인간 관계에 문제점이 있겠지만, 주기적으로 문제점이 드러난다면 원인을 제대로 파헤쳐볼 필요가 있습니다. 관계에 왜 문제가 있는지 파악하다 보면, 원인이 [가족]에서부터 오는 경우가 상당히 많습니다. 어렸을 때 가족 간 겪었던 관계의 트라우마가 뒤늦게 발견되기 때문이죠. 모든 트라우마를 극복할 순 없겠습니다만, 만일 이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다면, 가족끼리의 관계가 재정립될 수 있어서 새로운 세계를 보게 되기도 합니다.


가족 다음으로 중요한 관계는 [친구]입니다. 미우나 고우나 가족은 생존을 위해 최적화되어 있는데요. 육체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게 가족이라면, 감정의 생존을 위해 대상이 필요합니다. 감정은 [희/노/애/락/애/오/욕]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요. 이 모든 감정을 가족과 함께 나눌 수 있다면 가장 좋을 것입니다. 하지만 일부 감정을 나누지 못할 수 있겠죠. 그럴 때 부족한 감정을 채울 수 있는 또 다른 대상, [친구]가 필요합니다.


어쩌면 감정을 온전히 나눌 수 있는 [친구]를 찾기 위해 그토록 많은 인간관계를 맺고 끊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서로 등을 맞댈 수 있는 친구 1명을 얻기 위해 100명의 사람이 내 곁을 스쳐 지나가는 셈이죠. 반대로 생각하면 100명이 스쳐 지나갔기 때문에, 친구 1명을 만난 것이기도 합니다. 믿었던 친구에게 배신당하더라도, 또다시 새로운 친구를 만들 수밖에 없는 건 스스로 감정이 생존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만난 믿을 수 있는 친구를 주로 평생 함께할 동반자인 배우자로 선택하여 새로운 가족을 형성하죠. 감정의 생존을 위해 만난 친구가 육체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가족이 되는 겁니다. 사랑하는 감정으로 애인이 될 수 있겠습니다만, 감정만으로 결혼을 선택하는 건 어려운 것 같습니다. 서로 등을 맞댈만한 배우자인지 파악하는 게 좀 쉬워야 말이죠.


가족과 친구는 각각 육체와 감정의 생존과 대응되는데 감정의 생존까지 충족되면, 이성을 충족하려는 단계인 지인 숫자 늘리기에 돌입합니다. 아는 사람이 많으면 살아가는데 종종 덕을 보곤 하죠. 실제 가족/친구/지인 중 지인의 숫자가 가장 많습니다. 친구에게는 [감정]을 완전히 드러내지만, 지인에게는 [매너/예의]라는 이름으로 [감정]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씁니다. 그래서 고등학교/대학교를 졸업하고 만나는 관계는 아무래도 상호 계산이 깔릴 수밖에 없죠. 겉으로 드러나는 스펙 중심으로 생각하면서 저 지인이 내게 도움이 될만한 사람인가를 놓고 판단합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만 보고 함부로 판단하지 않으려고 애쓰지만, 이 길은 쉽고 효율적이라 선택하지 않기가 어렵죠. 왜냐하면 누군가를 온전하게 이해하는 건 상당히 많은 에너지가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연약한 인간이기에 쉽고 빠른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건 인정하되, 쉽고 빠르다고 해서 그게 100% 옳은 게 아니라는 인식만큼은 놓치면 안 되겠습니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시작된 관계가 점점 잦아지면, 자연스럽게 감정을 공유하는 친구로 발전하게 됩니다. 관계가 익숙해지다 보면 편안해지니까 아무래도 조심성도 좀 줄어들게 되죠. 감정을 공유하는 관계로 발전하게 되면, 더 이상 서로 계산하지 않게 됩니다.




2.

생존하기 위해서

감정을 관리하다


가족이 육체적 생존과 감정적 생존을 모두 보장해준다면 참 좋겠죠. 부모님과 친구처럼 허물없이 지내면서 다양한 고민을 허심탄회하게 나눌 수 있다면 그것만큼 좋은 관계는 드물 겁니다. 하지만 가족에게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것은 육체적 생존뿐이겠지요. 친구에게 자신의 육체적 생존을 요구하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한편, 친구라고 해서 모든 감정적 생존을 보장하진 않습니다. 친구 한 명에게 나의 모든 감정을 다 공유하다가 자칫 그 친구가 지쳐서 나를 떠나게 될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감정을 공유하지 않으면 스스로 존재 가치를 잃어버릴 수 있기에 어느 정도 감정은 공유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친구 A와는 감정의 일부를 공유하고, 친구 B와는 또 다른 감정의 일부를 공유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 같은데요.


정말 인생에 몇 번 찾아오기 힘들 정도로, 감정이 와르르 무너질 때가 있죠. 그럴 때는 주기적으로 친구를 바꿔가면서 모든 감정을 공유하는 시간을 갖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런 건 정말 힘들 때만 해야지, 매사에 이렇게 감정을 모두 공유하고 지낸다면 감정을 공유받는 친구는 문득 자신이 감정의 쓰레기통이 된다는 생각이 들어서 관계를 포기하게 될 수도 있거든요.


모든 인간 관계는 원래 모르는 사람이었다는 것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우리 부모님도 원래 저랑 모르던 사이였는데, 제가 태어나보니 제 부모님이 되었죠. 제 친구들도 만나기 전까지는 모르던 사이였는데, 지인이 되었다가 어느새 제 친구가 되었습니다. 반대로 가족이라서, 친구라서 믿었는데 원수만도 못한 관계가 되기도 하고요. 그래서 관계를 [가족/친구/지인]으로 명확하게 구분하기란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우리는 중요도에 따라 인간 관계를 [가족/친구/지인]으로 나눠서 관리한다는 점, 관계를 맺는 이유는 생존과 직결되기 때문이라는 점, 온전한 가족 구성원을 만나기 위해 그토록 많은 친구와 지인을 만난다는 점, 가족이라고 해서 모든 감정을 온전히 소통할 수 있지 않다는 점, 가족에게는 육체적 생존만 요구할 수 있다는 점, 아무리 친구라도 모든 감정적 생존을 보장할 수는 없다는 점, 인간 관계에 회의가 들 때는 핵심 관계부터 순차적으로 점검해보는 게 필요하다는 점 등을 짚어볼 수 있게 된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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