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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이미 그 일을 하고 있다

자격증이 없긴 해도 상담 좀 했던 사람입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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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alook.so/posts/KmtBjeb



- 글을 쓰게 된 목적 :


배우가 될 사람은 이미 연기를 하고 있다. 웹툰 작가가 될 사람은 지금 그리고 있다. 웹툰 작가 이종범 씨가 말했던 이 두 문장은 생각보다 오랫동안 내 머릿 속에 머물고 있다. 이 얘기는 비단 웹툰 작가를 지망하는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얘기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진로를 고민하는 모든 청춘, 더 나아가 [직]을 넘어 평생 [업]을 고민하는 장년과 중년에게도 유효한 말일테니. 내 삶을 돌아보았을 때, 나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나는 어느 곳에 가더라도 이미 [상담]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사람과 관계에 대한 관심, 수다스러운 성격이 어느새 [상담]하는 사람으로 만들었던 것 같다. 상담이란 무엇인가를 배웠는데, 깨졌던 사람이 망가진 사람을 돌보는 일이란다. 그러니까 깨졌던 과거의 삶은 당시에는 매우 고통스러울지 몰라도 좋은 [상담]가가 될 수 있는 자질이 되려나 보다. 그런데 요즘 들어 계속 깨지고 망가지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 위로는 각자만의 방식으로 할 수밖에 없는 법, 자신이 시도하는 위로 방식이 상대방에게 전달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만 잊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위로와 공감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사람들의 망언 한 마디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겪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태원 참사의 희생자들을 위로하는 헌화를 하고 왔다. 이름도 얼굴도 없는 그들을 위로하면서 나도 모르게 얼굴이 벌개지고 눈물이 났다. 있어선 안 되었을 일에 대한 분노, 사전 대비가 미흡했던 위정자에 대한 원망, 제대로 된 사과는 기대하기도 어려운 답답함 등이 나를 스쳐 지나갔기 때문일런지도. 믿을 수 없는 참사가 터질 때마다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이미 위로를 하고 있는 사람이니, 과연 나는 위로자가 맞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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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준평론


당신은 이미 그 일을 하고 있다


0.

당신은 이미 그

일을 하고 있다


진로를 고민하는 일은 청소년기에만 하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시대가 변하면서 평생직장의 개념이 사라지다 보니, 무엇을 하면서 살 것인지를 놓고 늘 고민하게 됩니다. [진로]를 설계하고 직업을 선택할 때, 가장 먼저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어떻게 꾸려나갈 것인지를 고민하게 됩니다. 하지만 직장에 들어가 최소 3년에서 길게는 10년 정도 시간이 지나 자신의 [직]에 익숙해지면, 슬슬 [업]에 대한 고민이 머릿속에 스멀스멀 생겨나는데요.


- 내가 이러려고 태어난 것인가?

- 이거 하려고 그렇게 열심히 공부한 거 아닌데.

- 지금 이 일이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인가?


물론 사람마다 처한 상황이 다르니, 위와 같은 질문 자체를 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지금 당장 생존이 급하고 생계를 꾸려나가는 것만으로도 벅차니,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질문을 억누르는 사람도 있겠죠. 저 역시 생계를 고민하는 생활인입니다만,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위해 하기 싫은 일을 매일 버티는 생활인을 존경합니다. 하지만 자기 삶에 대해 질문이 올라올 때, 너무 억누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이런 질문이 생기는 걸 계기로 잠깐 짬이 생길 때, 종종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이 오히려 건강한 활동이 아닐까 싶어서 말입니다.


직업을 한자 말로 풀면, 職業인데요. 직분을 의미하는 [직]과 행위를 의미하는 [업]이 합쳐진 말입니다. 그러니까 생계를 위해 노력하는 [직], 그 직장 안에서 수행하는 행위인 [업]을 구분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죠. 처음에야 [직]에 집중하는 삶을 살겠습니다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적응하고 나면 본질에 가까운 [업]에 대해 고민하는 시기가 찾아옵니다. 최소한의 생존을 어느 정도 확보하고 나면, 자연스럽게 삶의 목적과 본질을 고민하게 되니까요. [업]은 산스크리트어 [카르마]를 번역한 말인데요. 업보/운명/사명 같은 말로 해석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 그 일을 하는 것은 어쩌면 정해진 운명과 같다고 볼 수 있죠.


https://youtu.be/MxPmikECcbg?t=2144


자신의 진로를 고민하고 있거나 막연함을 느끼는 사람을 만날 때, 저는 웹툰 작가 주호민 씨가 웹툰 작가 이종범 씨를 만나서 인터뷰한 동영상을 추천하곤 하는데요. 웹툰 작가가 되기 위해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한마디 해달라는 주호민 작가의 말에 이종범 작가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강렬한 두 문장을 남겼는데요.


- 배우가 될 사람은 이미 연기를 하고 있다.

- 웹툰 작가가 될 사람은 지금 그리고 있다.


정말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습니까? "제가 이 일을 해도 될까요?"라고 질문을 던지는 사람 중 상당수는 어설프게나마 비슷하게 이미 그 일을 수행하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왜 이 일을 해도 될지 고민하는 것일까요? 아마 내가 과연 [잘]할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을 얻기 위해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종범 작가의 말에 내가 이미 하고 있는 일은 무엇일지 저는 스스로 질문을 던져보았습니다. 누가 시키지 않았지만 저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을 즐거워했고, 수다스러웠으며, 글을 썼고, 인간관계에 늘 진심이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관심이 있던 영역이 있다면, 바로 [상담]이었습니다. 앞서 언급한 문장처럼 바꿔서 써보면 다음과 같이 쓸 수 있겠네요.


- 상담가 할 사람은 이미 지금 상담을 하고 있다




1.

깨졌던 사람이

망가진 사람을


지난주 [상담]을 주제로 하는 수업을 들었습니다. 참 많은 이야기를 들었지만, 머릿속에 오롯이 남은 건 상담의 정의였습니다. 어떻게 번역해야 좋을지 모르겠는데, 영어로는 broken people이 broken people을 위로하는 일이 상담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쩌면 나는 나도 모르게 상담을 계속해왔던 것은 아닐까.


다른 사람의 아픔에 공감하는 일은 참 어렵습니다. 일단 나는 당사자가 아니므로 당사자의 마음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에 대한 [공감]이란 과거에 내가 겪었던 상처를 통해, 상대방의 아픔을 가늠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공감의 시작은 내가 상대방의 마음과 아픔을 헤아릴 수 없음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누군가 슬퍼하면서 울고 있다면, 그저 다 울 때까지 지켜봐 주거나 토닥이는 정도면 충분합니다. "어떻게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가 가장 솔직하면서도 최선의 위로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한 차례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충분히 허우적거리고 난 후, 당사자가 감정의 지배에서 벗어나려고 할 때 위로의 말은 비로소 효과를 발휘합니다.


무엇을 어떻게 하길 원하는지, 혹은 무엇을 어떻게 하지 않길 원하는지, 혹은 지금 무엇을 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은지 등을 물어보면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이 필요합니다. 감정의 늪에 너무 깊게 빠져있는 것 같다면, 전문가의 상담을 권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죠.


스트레스의 원인은 대부분 인지부조화에서 옵니다. 자신의 세계관에서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상식과 어긋나는 사건이 발생하면, 이 어긋남을 해결하려는 행동을 취하게 됩니다. 자신의 세계관에서 통용되는 상식을 수정하거나, 발생한 사건을 부정하고 회피하는 방법 중 선택하게 되는데요.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겪고 사람이 확 달라지는 경우는 전자이고, 이해할 수 없는 상대방을 향해 혐오 표현을 쓰거나 뒷담화하는 경우는 후자에 해당합니다.


정신적인 상처를 입거나 고통을 겪어서 확 달라진 경험을 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내 주변 사람들은 자신처럼 상처 입지 않기를 바랍니다. 저 역시 살면서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을 겪을 때마다 그 의미를 찾기 위해 애썼는데요. 때로는 고통의 의미를 알지 못한 채,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릴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뒤늦게 트라우마가 되어 찾아오는 경우도 종종 있죠. 고통을 우습게 보지 말고 늘 겸손해야 하는 까닭입니다.


아이러니하게 과거에 상처를 입었던 사람은 좋은 상담자가 될 가능성이 큽니다. 상처를 입었던 사람은 충분히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알기에 다른 사람이 겪은 고통의 크기를 함부로 가늠하지 않으니 말입니다.




2.

살 사람은 살아야지

조금은 아쉬운 위로


안타까운 죽음에 과도하게 슬퍼하는 사람을 보면, "살 사람은 살아야지."라는 말로 위로하고 달래는 일을 종종 봅니다. 저 역시도 심각한 아픔을 겪어보기 전까지, 공감을 잘 배우지 못했을 때까지 저렇게 위로했던 기억이 납니다. 참담한 일을 당한 당사자는 위와 같은 한 두 마디 말로 위로되기 어려운데요.


그렇다면, "살 사람은 살아야지."라는 말로 위로하는 사람은 잘못된 사람인가? 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위로하는 방식이 다를 뿐이죠. 자기 자신이 저런 말을 들었을 때, 위로가 되기 때문에 저렇게 위로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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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어준의 책, [닥치고 정치]에서는 좌파와 우파를 [공포]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구분하고 있습니다. 좌우를 구분하는 건 시대의 흐름에 따라 세련된 용어가 생겼을 뿐이지, 원래 좌우의 원형질이 각각 옛날부터 있었다고 보거든요.


우리의 세계는 생존을 위협받는 약육강식의 정글입니다. 우파는 나부터 먼저 살아남는 게 중요합니다. 반면에 좌파는 정글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인식합니다. 이러한 인식의 차이는 생존을 위협받는 문제가 발생했을 때, 책임을 [개인]의 문제로 전가하거나 사회적 [구조]에 전가하는 차이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은 각자 타고나는 영역으로 보는데요.


그러니까 자신에게 위로가 되는 말이 다른 사람에게는 위로가 되지 않을 수 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서로 타고난 것이 다르니, 서로의 다름을 존중해야 하는 것이죠. 어떤 사람은 개인의 문제로 생각했을 때,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위로가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구조의 문제로 생각했을 때,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위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듣기 원하는 위로로 상대방을 위로해 줄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필요한 위로의 말을 건네는 것이 적절하겠습니다. 심지어 그것이 조금 어색한 연기처럼 보일지라도 말이죠.


정리하면, 자신이 과거에 겪었던 고통을 통해 타인이 겪은 고통을 가늠할 뿐, 타인의 고통에 온전히 공감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공감은 모름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위로란 상대방의 감정이 충분히 진정되고 난 후,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상대방이 무엇을 원하는지 들어주면 됩니다. 개인을 상대로 원망하고 싶었다면, 함께 욕해주면서 가슴 속 응어리를 풀어나가는 것이죠. 사회의 구조를 문제 삼고 싶었다면, 어떻게 해야 재발을 방지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실행하면 됩니다. 그런데 위로의 말 한마디를 전하는 게 왜 이리도 어려운 것인지요.




3.

위로의 말은 커녕

불난 집에 부채질


강남역 11번 출구 이태원 참사 희생자 합동 분향소


지난주 토요일에 있었던 이태원 압사 사고를 놓고,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만의 방식으로 애도하고 있습니다. 저도 강남역에 나가 이태원 압사 사고 희생자를 위한 묵념을 드리고 왔습니다. 희생자의 이름은 온데간데없고, 그저 [이태원 사고 사망자] 여덟 글자만이 제 눈앞에 있었는데요.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는 이를 위해 추모하는데, 갑자기 눈물이 났습니다. 일부 이름이라도 가려서 써놔 줬으면 어땠을까 싶은 마음이 들었네요.


그중 문제의 원인을 개인에게 돌리는 언행이 화제인데요. 특히, 사람이 몰릴 것을 뻔히 알면서도 왜 거기에 갔느냐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와 남북전쟁을 거쳐오면서 몸에 새겨진 공포에 지배받던 할머니/할아버지들이 주로 많이 말씀하시던 얘기가 생각납니다. 사람 많은 곳, 함부로 가지 말라는 말은 언제든지 어디든지 갈 수 있는 자유가 없던 시대에 적합한 이야기였죠. 공포가 일상이던 그들에게 개인의 [각자도생]은 지극히 당연한 상식이었습니다.


https://www.korea.kr/special/policyCurationView.do?newsId=148898074

2021년 7월, 대한민국은 국제사회로부터 선진국 지위를 공인받았습니다. 더 이상 생존을 위협받는 시대가 아니란 뜻이죠. 이번 참사를 후진국형 재앙으로 보는 까닭은 선진국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선진국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까닭에 우리는 어떻게든 이 인지부조화를 해소해야 합니다.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아니었거나, 선진국에서도 이런 재앙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겠죠.


이번 참사를 개인의 문제로 치환해서 보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각자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에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을 원망하지도 않고요. 다만 개인의 문제로 치환해서 보려고 하는 사람들이 사는 세상은 마치 정글과도 같을 겁니다. 끊임없이 약육강식의 세계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남는 것에만 집중하는 세상이겠죠.


다음 세대에게 [자유]의 가치를 설파하면서도, 사람 많은 곳에는 절대 가지마라 라고 말할 겁니다. 재발 방지를 위해 애쓰면서도 문제의 원인은 개인에게 돌려질 수 있으니 알아서 조심하라고 말하는 세상이겠죠. 앞으로 또 이런 일이 생기면, 알아서 조심하고 묵살했던 중간관리자를 꼬리 자르기로 쳐내면 그만일 것이니 말입니다. 이쯤 되면 정부의 존재 목적과 안전 보장의 의의를 의심하게 되겠지만, 어떡하겠습니까? 원래 이 세상은 약육강식의 세계인 것을요.


https://youtu.be/PIO9j-kohrk


김성회 전 대통령비서실 종교다문화비서관은 이번 이태원 참사의 원인으로 부모의 관리 소홀을 꼬집었습니다. 다시금 대한민국이 얼마나 안전하지 않은 국가인지 생각해보게 되네요. 각자도생과 약육강식의 세계라는 걸 깨닫게 해줍니다. 자녀가 성인이 되었어도 부모는 계속 사람 많은 곳에 가지 말라고 얘기해야 하는 것이죠. 80살 먹은 노인이 되었어도 사람 많은 곳에는 가지 말아야 하는 겁니다.


https://youtu.be/N8wRnYl5ZSY


윤석열 대통령이 대선후보 시절 멘토로 알려진 천공스승 이병철 씨는 희생자들의 목숨이 보람되게 하려면, 이걸 기회로 사용해서 세계에 빛나는 일을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전 세계 지도자가 대한민국 대통령에게 위로의 메시지를 받는 이때, 세계에서 가장 빛나는 일을 하겠다는 답장을 일일이 보내야 한다는 이야기합니다.


개인에게 책임을 지우려는 이야기들은 [각자도생]의 관점으로 어떻게든 이해해보려고 노력했습니다만, 청년의 죽음을 오히려 이용하자는 메시지만큼은 도무지 동의하기 어렵네요. 청년의 목숨을 빚져서 만들어진 빛나는 대한민국은 전혀 자랑스럽지 않고 오히려 부끄럽습니다.


굳이 세계에서 빛나는 일 따위는 안 해도 좋으니, 참사가 일어나지 않는 게 더 낫지 않을까요? 대통령께서 친히 [국가 애도 기간]을 갖자고 말씀해주셨는데요. 위로의 메시지보다는 피해자와 유가족의 분노에 오히려 부채질하는 말이 가득했던 일주일이었던 듯합니다.


https://youtu.be/V5szN9nJ08Q


이태원에서 장사하던 한 상인은 참사 당시 자신의 가게 문을 개방해 많은 부상자를 구했지만, 자신의 눈앞에서 죽어간 청년을 잊을 수 없었나 봅니다. 이름도 모르는 청년을 위해 제사상을 차리고, 밥 한 끼는 먹여야 하지 않겠냐면서 자신의 방식으로 죽어간 생명을 추모합니다. 경찰은 상인의 행동을 제지합니다만, 이내 같이 울음을 터뜨려 버리고 마는데요. 그의 언행은 그 자체만으로 피해자와 유가족들에게 공감과 위로가 되지 않았을까 감히 추측해 봅니다.


https://youtu.be/HIY7-__A0sA


이태원파출소의 김백겸 경사는 참사 현장에서 사람들을 통제하며, 최선을 다해 생명을 구하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온라인에 잘못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현장에서 목격했던 시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구조 활동에 동참했었다고 증언했는데요. 김백겸 경사는 자기 처남이 이태원에 있었고, 집에 귀가했다는 말을 듣기 전까지 초조했던 마음으로 구조 활동을 펼쳤다고 합니다. 자신이 느꼈던 압박감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고통 속에 놓여 있을 유족들을 생각하면, 자신의 고통은 고통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말을 전하면서 끝내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4.

압사 생존자가 남긴

말에서 발견한 위로


https://theqoo.net/square/2626564360


이번 이태원 압사 사고의 실제 생존자로 추정되는 인물이 상담가와 나눈 상담치료를 담담하게 적어나간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이 이야기에서 실제로 벌어졌던 일을 생생하게 전달하면서도 위로의 말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가지 말았어야 했어요."라고 말하는 생존자의 말에 상담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에요. 가지 말았어야 하는 게 아니라 어디를 가도 안전하게 돌아갈 수 있게 지켜주는 것이 맞아요. 놀다가 참사를 당한 게 아니라, 일상을 살다가 참사를 당한 겁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말인데, 이 말이 생존자에게 위로가 되었다니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우리 사회는 노는 것에 덜 가치를 둡니다. 노는 것에 삶의 가치를 덜 두는 모습, 놀다가 참사를 당한 것은 마치 당해도 괜찮은 것이라고 받아들이고 있는 건 아닐까요? 왜 노는 것은 일상의 부분이 되지 못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생존자는 다른 사람들이 실려 나갈 때 세상모르고 놀았던 자신을, CPR을 도와달라는 요청을 거부하고 도망친 자신을 자책하면서 답답한 심정을 토로하였습니다. 상담전문가와 충분한 상담 후에 이태원역 1번 출구에 방문하여 헌화하고, 진심으로 사과하였습니다. 피해자에게 사과를 하고 난 생존자는 이제 반대로 사과를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모양입니다. 억지로 떠밀려 엉터리로 사과하는 위정자에게 분노하며, 단 하나의 질문을 남깁니다.


- 그래서 그날 필요한 경찰 인력들은 다 어디에 있었는가?


참사의 피해자가 남긴 이 질문을 보면서 반드시 답을 찾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질문의 답을 찾아야 다시 이런 참사가 반복되지 않을 테니 말이죠. 이런 참사를 지켜보았으면서도 그저 개인의 잘못으로 치부해 버린다면, 그 세상은 생존만을 고민하는 정글 같을 것 같습니다.


- 사람 많은 장소는 압사당할 위험이 있으니 가지 말아야 합니다.

- 사람 없는 장소는 강도당할 위험이 있으니 가지 말아야 합니다.

- 놀다가 사고당하면 안 되니까 함부로 놀러 가지 말아야 합니다.

- 일하다 사고당하면 기업 이미지가 나빠지니 알아서 조심합니다.

- 쇼핑하다 사고당하면 개인의 잘못이니 백화점에 가면 안 됩니다.

- 입대해야 할 땐 국가의 아들이지만, 사고 나면 너희의 아들입니다.


이번 이태원 참사 사고에 너무 과몰입했나 봅니다. 선진국인 대한민국에서 이번 참사를 끝으로 앞으로도 이럴 일은 없겠지요. 반드시 없어야 할 테고 말입니다. 이런 참사가 일어난 마당에 선진국이냐 아니냐를 논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마는 어떤 사람은 생명보다 우리나라가 어떻게 비치는지 국가 이미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니까 말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이미지에 집착하면서 오직 생존만이 목적인 이 정글 속에서, 나약한 개인은 알아서 잘 피해 다닐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물론 언제까지 피할 수 없을 것 같지만 말입니다.


위로가 필요한 곳에 이미 위로를 하고 있다면, 저는 위로자인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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