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서 처음으로 악플을 받아본 지 어느새 한 달이 지났다. 지금 돌아보면 어리석은 대응이었다고 생각한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말은 섬광기억을 남긴다. 섬광기억이란 너무나 강렬한 기억이라 오랫동안 뇌리에 남아서 끊임없이 재생되는 기억을 의미한다. 내가 받았던 악플은 섬광기억이 되어 나를 자극하고 있었나 보다. 어떤 사람은 그냥 잊어버리거나 넘어가라고 말하지만, 심지어 나도 그렇게 하고 싶은데 잘 안 된다. 소통과 리액션에 특화되어 있어서인지, 다른 사람의 반응에 지나치는 지혜를 배우지 못했나 보다. 이런 모습을 마주할 때면 스스로 이기적이지 못한 게 당황스러울 때가 있다. 이 글을 쓴 오늘은 부활절이고, 지난주는 고난주간이었다. 인지하지도 못했는데, 얼추 계산해보니 이쯤이었던 것 같고, 찾아보니까 내 예상이 맞았다. 예수님이 당하셨던 고난에 감히 내가 당했던 고난을 비교할 수 있겠냐마는 지난 한 달은 내게 고난월간이었고, 지난 한 주는 내게 부활주간이었다. 너무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지만, 보상을 통해 지난 고난월간에 받았던 고난이 깨끗이 잊히는 기적을 맛보았다. 모든 고난에 반드시 보상이 따르는 건 아니지만, 이번엔 유독 신기한 일이 많았다. [기적]을 경험하는 삶은 어쩌면 이런 삶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저는 7년 정도 공개 SNS에 글을 쓰지 않다가 alookso에 글을 쓰는 것으로 다시 글을 쓰기로 결심했습니다. 나름 글을 쓰는데 재미를 붙이고 있었는데요. 이왕 글을 쓸 거면, 다양한 SNS 플랫폼에 글을 써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네이버 블로그, 브런치, 인스타그램 등 다양한 SNS에 제가 쓴 글을 올리거나 요약해서 올리곤 했습니다. 참고로 저는 SNS 관리를 해주는 링크트리라는 플랫폼을 활용하고 있는데, 다양한 플랫폼에 글을 올릴 때 홍보하는데 꽤 유용합니다.
지금부터 딱 한 달 전, 윤석열 당선자에 대한 글을 올렸을 무렵, 저는 인스타그램에서 처음으로 긴 답글을 받게 되었습니다. 해당 답글을 쓴 사람은 제가 쓴 글의 내용을 놓고 비난하고 있었습니다. 일단 처음 받은 긴 답글이니만큼 나름 점잖게 대응했다고 생각했는데, 상대방은 그 답글을 계기로 점점 해당 글을 쓴 저 자신을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메시지에서 점점 메신저를 공격하는 형태로 바뀌고 있었죠.
어느 시점부터는 왠지 제가 괜히 대응을 했다고 여겨졌는데요. 제가 썼던 글을 놓고 무섭게 비난하는 모습에 살짝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소위 말하는 악플을 받은 셈인데, 왜 악플을 받으면 사람이 움츠러들고, 소심해지는지 느꼈던 시간이었습니다. 남들이 보는 곳에 게시글을 공개해서 뽐낼 때는 기분이 좋았지만, 막상 제가 쓴 게시글에 태클이 걸리니까 몹시 기분이 나빠하던 제 모습이 드러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인스타그램에 사용자를 차단하는 기능이 있는지 당시에 몰랐는데요. 뒤늦게 제 친구의 도움을 받아서 해당 기능이 있다는 사실을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해당 사용자를 차단했지만, 당시 상처를 꽤 받았던 것 같습니다. 태어나서 처음 받아본 악플이었는데, 그 악플이 제게는 상당히 매섭더군요. 어쩌면 그때부터 제 말과 글에서 조금씩 날카로운 감정이 묻어났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어쩌면 악플 때문에 상했던 감정이 제 글에 스며들었는지도 모르죠.
2.
예민한 감정 상태
불난 집에 부채질
안 좋은 일은 한 번에 온다고 하죠. 이 일이 있은 후부터 제 감정이 조금 예민해지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작고 사소한 일에도 금방 화를 낸다거나, 별 거 아닌 문제를 크게 키우는 일이 많아졌죠. 그렇게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 들어가서 전혀 헤어 나오지 못하는 순간이 여러 번 찾아왔습니다. 어느 순간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어가는 늪에 들어간 듯한 느낌이 들었죠.
그냥 미끼를 던져분 것이고 그놈은 확 물어분 것이여
제 생각에는 악플러가 던진 미끼를 제가 물어버린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냥 그는 온라인 상에 있는 글을 문제 삼았을 뿐인데, 무시하고 지나가지 못한 제 성격이 문제라면 문제겠죠. 점점 제가 처한 상황이 악화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일이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저는 제 지인들에게 제가 처한 좋지 못한 상황을 놓고 도움을 요청했더랬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변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다양한 조언을 들었지만, 그중 제가 가장 와닿는 조언은 바로 [과잉대응]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상대방이 제게 10점 만점에 3점 정도 되는 수준으로 잘못을 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제 입장에서는 딱 3점 정도로 응대하면 되겠죠?
그런데 제가 감정이 예민해져 있다 보니, 상대방에게 7점 정도로 응대하게 된 겁니다. 그럼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잘못한 게 맞긴 합니다만, 이 정도까지 잘못한 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겠죠. 그러다 보니 상대방은 제게 더욱 강하게 대응하게 되고, 저 역시도 맞불을 놓을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3.
감정의 과잉대응
싸움의 핵심원인
제게 조언해주셨던 분 중 한 분이 [감정의 과잉상태]가 저를 매우 위험한 상황에 빠뜨리고 있는 것 같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따라서 저는 이런 과잉상태를 어떻게 벗어나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한참 생각했습니다.
우선, 앞으로 사람들에게 말할 때, 감정의 날카로움이 묻어날 수 있으니 주의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누군가 제게 시비를 3점 수준으로 걸더라도 7점으로 응대할 게 아니라 가까스로 5점 수준까지로 낮추려고 노력했습니다.
예를 들어 징역 3개월 정도 벌을 받으면 될 사람에게 30년형을 내리면 너무한 처사가 될 테니까요. 이러한 이유로 저는 지난주까지 제 삶의 모든 영역은 전쟁통이었습니다. 되는 일은 하나도 없고, 주변의 사람들 중 대부분은 제 [적]이라고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그랬던 것일까요? 저는 저도 모르게 제가 사용하는 단어에 [편]이라는 말이 수도 없이 사용되었던 모양입니다. 네 편 내 편 할 때 사용하는 바로 그 [편] 말입니다. 또 다른 분으로부터 현재 제 상황을 놓고 조언을 들었는데, [편]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는 사람은 정서가 상당히 불안한 상태일 수 있다고 말씀해주시더군요.
조언을 듣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랬습니다. 전쟁을 벌이지 않는 한 평소에 [편]이라는 단어를 쓸 일이 거의 없지 않겠습니까? 저 역시 평소에는 [편]이라는 단어를 쓴 기억이 없었습니다. 상황이 저를 계속 핀치에 몰리게 만드니까 저도 모르게 제 [편]이 필요했었나 봅니다.
최대한 숨겨보려고 애를 썼는데, 어쩌면 제 글에서도 이런 날카로운 모습이 드러났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시라도 제 글에서 불편한 감정이 느껴졌던 분이 계시다면, 그것은 제가 갖고 있는 감정이 글에서 드러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혹시 불편하셨던 분이 계시다면 이 자리를 빌려 미안하다는 말씀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4.
고난주간이 아니라
고난월간을 보내다
2022년 4월 17일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부활절이고, 부활절 이전 한 주간을 고난주간이라고 부릅니다. 이제야 말씀드립니다만, 저는 고난주간이 오기 전까지 한 달 동안 너무나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한 달 정도 고통을 받았으니, 고난월간이라고 해야 할까요? 제가 하는 일마다 제대로 되는 일은 하나도 없고, 답답한 상황만 계속 이어져서 악순환이 반복되었습니다.
어쩌면 이 고통의 시작은 앞에서 설명했던 악플에서부터 시작된 게 아닐까 싶습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해당 악플 때문에 제 감정을 스스로 컨트롤하지 못하게 된 게 매사에 감정적으로 과잉 대응하게 되었던 것 같아요. 그게 저를 스스로 전쟁 같은 상황으로 몰아넣었던 것 같습니다. 가수 신해철의 노래 Lazenca, Save Us에 나오는 가사, [스스로 불러온 재앙에 짓눌려]처럼 말입니다.
삶의 전 영역이 전쟁통이 되고 나서 저는 하나둘씩 전선을 줄여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멋준건의] 시리즈로 계속 alookso에 공격적인 글을 올리던 일도 현생의 삶이 급해지니, 더 이상 붙잡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라도 전선을 줄여나가는 게 제겐 시급한 일이었습니다.
그 외에 제가 피해보상을 받았어야 할 사건이 있었는데, 실제적으로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하게 돼서 무척 화가 났었는데요. 이 문제를 놓고 관리자 분에게 전화로 이야기를 하다가 또 화를 냈었습니다. 지난 고난월간은 화를 참을 수 없는 기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5.
과잉된 감정만큼
사과했을 뿐인데
통화를 종료하고 나서 생각해보니, 굳이 언성을 높여가면서 얘기했던 게 불필요했던 문제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카카오톡으로 제가 언성을 높인 점을 놓고 바로 사과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주에 정말 신기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죠.
alookso에서 Zoom 모임으로라도 만나고 싶다는 빅맥쎄트 님의 말에 제가 총대를 메고 나섰습니다. 평소 같았으면 절대 총대를 메지 않았을 사안인데, 최근에 총대를 좀 메어 본 경험이 생겨서 그랬는지 무슨 용기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저도 모르게 오픈채팅방을 만들어 사람들을 모으고 있더군요. 아무래도 제가 [소통]에 너무 목말랐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또한 제게 언성을 높였던 관리자 분이 제게 따로 연락을 주시고 난 후, 피해보상을 해주셔야 할 분까지도 제게 따로 연락을 주셨습니다. 특히, 피해보상을 해주셔야 할 분께서는 죄송하다는 진심을 담아서 말씀해주셔서 제가 갖고 있던 화가 많이 풀렸습니다. 어쩌면 저는 단순히 보상받고 싶다기보다는 진심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도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인가 봅니다.
저는 피해자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가해자가 되어있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곰곰이 생각해봤고, 결국 감정이 과잉되어 대응했던 게 문제였다고 봅니다. 저는 과잉된 감정만큼만 덜어내어 사과했을 뿐인데, 진심을 알아주는 사람이 나타나기 시작했죠. 제가 바라는 대로 문제는 모두 해결되었고, 덤으로 제게 유익한 일들이 계속 물밀듯 이어졌습니다.
6.
고난월간을 버티고
부활주간을 지내며
어떻게 이런 일들이 생긴 것일까요? 어쩌면 제 감정이 평소보다 과잉되어 있음을 인지하고 멈췄기 때문일까요? 그저 멈췄을 뿐인데, 왜 일은 잘 풀렸는지 아직도 그 이유를 잘 모르겠고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그래도 이것 하나만큼은 분명합니다.
자신의 상태를 스스로 진단할 수 있어야, 복잡하게 얽힌 문제를 풀 시작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만일 제가 피해자라고만 생각해서 불필요하게 언성을 높여가며 대응했던 잘못을 사과하려고 들지 않았다면, 아마 이 문제는 해결될 실마리를 잡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한 가지 더, 제가 생각보다 꽤 좋은 사람들을 주변에 많이 뒀단 사실입니다. 제 앞에 해결할 수 없는 난관이 있을 때, 조언을 구할 수 있고,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 제 옆에 많이 있음을 알게 되어 감사했습니다. 저는 하마터면 제가 당한 일을 빌미 삼아 다른 사람에게 더 큰 상처를 줄 수도 있었던 사람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제가 스스로 잘 멈추고 참아낼 수 있었던 까닭은 저를 지지해준 사람들의 기대에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이렇게 글로 정리해서 쓰는 까닭은 글에는 치유하는 힘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글을 쓰면서 그간의 잘못을 돌아보면서 스스로를 치유하고 싶었죠.
이번 주가 기독교에서 말하는 고난주간이었고, 이 글을 쓰는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지난 한 달은 제게 고난월간이었고, 지난 주가 제게는 부활주간이 되었습니다. 본캐의 사생활이 섞여 있어서 제가 처한 상황을 전부 말씀드리지는 못하지만, 지난 한 주 동안은 그동안의 고통을 보상받는 기간 같았습니다.
모든 고통에 반드시 보상이 따르는 건 아닙니다. 때로는 열심히 노력했지만, 아무런 보상 없이 지나갈 수도 있죠. 그렇다고 해서 제게 보상이 왔는데 누리지 않는 것도 조금 이상하지 않을까요? 저는 지금 제게 주어진 이 보상을 마음껏 만끽할 계획입니다. 중간 맥락이 명확하지 않아서 뜬금없겠지만, 그간의 고통에 대한 보상을 마음껏 누려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