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가워.
은설이는 아빠를 닮았는지 상당히 fm이어서 규칙을 너무너무 잘 지켜 피곤한 스타일이다. 어린이집 선생님 얘기 들어보면 ‘선생님 입장에선 고마운 아이, 아이 입장을 생각하면 짠한 구석이 있는 아이’라고 했다.
은설이도 나름 귀찮고 하기 싫은 건 안 하긴 하지만 요런 대범한 사고는 거의 한 번도 없었기에 허허 웃음이 실실 나왔다.
밥 야무지게 먹고 티브이 보는 동안 나는 설거지를 했다. 설거지 마치고 은설이를 돌아보니 장난감 전화기에 크레파스로 낙서를 하고 있기에 ‘음- 저 정도야 뭐.’ 했는데 은설이 뒤편으로 거실 한가운데에 떡하니 은설이 키만큼 아니 그보다 더 큰 낙서가 있는 게 아닌가.
“은설아, 벽에 낙서했어?” 어이없어서 웃으며 말했는데 은설이는 대뜸 “엄마 모르는 줄 알았는데! 왜 알아버렸어?” 하며 화를 낸다. 방귀 뀐 놈이 성낸다는 말이 딱이었다. 웃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너무 귀여워서 웃으며 말해주었다. “이렇게 크게 낙서했는데 엄마가 어떻게 몰라.”
‘종이인 줄 알았다. 엄마가 모를 줄 알았다.’ 오열하면서 이말 저말 하다가 “다시는 안 그럴게요. 엄마 잘못했어요.” 한다. 화해(?)의 순간이다. “이리 와.” 하며 안아주었는데... 어째 울음이 잘 안 멈춘다. 이상했다. 나는 크게 혼내지도 않았고 사실 진짜 1도 화가 안 나고 오히려 은설이가 일탈을 시도한 것에 기쁘고 반가운 마음도 있었는데, 그냥 다음에는 그러지 말자고 가볍게 이야기해주었을 뿐인데 왜 이리 우는 걸까 싶었다.
너무 졸려하기도 해서 달래면서 씻으러 화장실 들어가는데, 가는 중에도 계속 울었다. 그러더니 끝내 결국 “아빠가 보고 싶어요.” 은설이의 본심이 나왔다. 잘못을 했으니 엄마가 혼냈고, 아빠가 안아줘야 하는데 아빠가 없으니 진정이 안되나 보다 했다.
슬슬 억울한 마음이 올라온다. 내가 혼내기를 했니 화내기를 했니 인상을 찌푸리길 했니. 나는 베실 베실 웃었다. 그리고 은설이는 혼란스러워했다. 혼날 줄 알았는데 안 혼났고 엄마는 웃어대고. 괜찮다 하니 말이다. 찝찝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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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품은 재밌긴 하지만 아빠 품이 따뜻한데.” 지난번 유난히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은설이의 그 표현은 다시 반복되었다. 끄응... (은설아 그 말은 엄마가 듣기 좀 힘들어. 속상해. 내가 널 얼마나 이뻐하는데.) 그냥 달래주기로 맘먹고 “어이구 은설이 슬프구나 아빠가 안아줘야 하는데... 아빠가 보고 싶은데 그치.” 아빠 소리를 들은 은설이는 오열했다. “누가 이렇게 은설이를 슬프게 할까”하고 어르는 목소리로 물어보자 은설이는 “엄마 때문에”라 한다. “엄마가 화내는 거 같아서 자꾸 눈물이 나요.”
그래, 지난날의 내가 작고 작은 너를 너무 몰아세웠었지. 숱하게... “엄마 혼나야겠네! 은설이 무섭게 하고. 그치. 엄마 때찌. 엄마 때찌.” 하는데 은설이 기분이 풀려 보인다. 이게 교육적인 건지 맞는 건지, 아닌 거 같은데, 지난날 잘못한 게 많-은 엄마는 그냥 이렇게 넘겼다.
귀여워 너. 이렇게 귀여운 사고(?) 친 것도 귀엽고. 은설이 찍은 사진 영상 보면서 웃고 있으니 “엄마는 사진 속에 은설이만 좋아하냐! 은설이는 지금 여기 있는데!” 하고 일침을 날리는 멘트도 너무 귀엽고. 애기처럼 안아주니 포동포동 살이 오른 게 느껴져서 너무 귀엽고. “엄마 할머니 같아요.” 하면서 제 딴의 칭찬을 하는 것도 귀엽고. 엄마가 신나게 놀아줘서 좋아질 때쯤 “은설이는 아빠랑 쌍둥이인데 엄마랑도 쌍둥이 하고 싶으면 어떡하지?”하며 내적 갈등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도 귀엽고.
여하튼, 은설이의 첫 일탈. 나는 너무 반가우니 이제 잘못했다는 말 그만해도 돼. (그래도 벽지 낙서는 이제 그만해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