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한나 Oct 06. 2020

첫 월경 즈음

반가워.


나는 엄마를 닮아서 가슴이 컸다. 초등학교 4학년 즘부터 가슴이 나오기 시작해서 초등학교 5학년 즈음에는 여자 친구들에게 인정 같은 걸 받기도 했다. 나는 움츠러들고 일부러 구부정하게 다녔던 것 같다. 흔한 그러나 짓궂은 장난으로 남자아이들은 몇몇 표적을 골랐다. 브래지어를 찼으며 놀리기 편한 여자 아이들 말이다. 몰래 뒤에서 브래지어 끈을 잡아당기고는 도망갔고 나는 그런 광경을 멀리서 보기만 했다. 나는 반응이 적고 언제든 째려보고 정색할 수 있는 태세여서였는지 놀리기 쉬운 스타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장난으로라도 엮이고 싶을 정도의 매력적인  대상이 아니었다. 나의 일이 아니었지만 그저 보기만 해도 위태로움을 느꼈던 것 같다. 등을 구부정하게 한 채로 앉아있으면 속옷이 옷에 비치는구나. 흰 옷일수록 더 잘 보이는구나.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고 의식하게 되었다.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했다. 조용히. 뭐, 그러지 않아도 그런 중이긴 했지만 말이다.



중학교에 올라가고 반에서 몇몇 친구들은 생리를 시작하였다. 가정 시간에 선생님은 생리 시작한 사람 있으면 손을 들어보라 하였고 많은 비율은 아니었지만 몇몇 시작을 했었다. 나는 생리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저 내가 가진 인상은 엄마가 생리 즈음되면 생리대를 갈면서 화장실에서 짜증과 투정을 많이 부린 것 정도였다. 어렸을 적에는 천으로 생리대를 만들어 썼고 그걸 세탁하는 일이 곤욕이었다 했다. 여름이 되면 땀이 차서 힘들고 겨울이 되면 얼음장 같은 차가운 물에 빨아야 해서 손이 무척 시렸다 했다. 잠을 자다가 혈이 새면 이불빨래는 덤이라는 것도 함께 말이다.

나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전학을 갔는데 전학 간 반에서 윤애라는 친구를 알게 되었다. 마침 우리 집에서 걸어서 2분 거리에 살고 있고, 같이 학원도 다니게 되어 가깝게 지냈었다. 키가 크고 날씬하며 얼굴이 하얗고 눈이 큰 아이였다. 밝고 웃음이 많고 맘이 여린 친구였다. 윤애는 세일러문을 좋아했고 덩달아 나도 그 만화를 보고 있었다. 윤애는 일어나서 세일러문 주제가를 크게 부르기도 했고 세일러문이 변신할 때 동작과 대사를 모방하며 푹 빠져있었다. 나는 그저 신기하게 보기만 했다. 슬슬 배가 아파왔다. 똥이 마려워서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휴지로 닦았는데 피가 묻어있었다. 얼떨떨했다. 아 이게 생리구나. 아래를 씻고 화장실 수납장에서 생리대를 찾아보았던 것 같다. 휴지를 둘둘 말아서 팬티에 대고 나왔는지, 아니면 그 집에 있던 생리대를 꺼내서 하고 나왔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생리 시작했다고 윤애에게 말한 것도 같고 그렇지 않은 것도 같다. 약간 당황한 기억만 난다.

집으로 돌아와서 엄마에게 말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희한한 반응이긴 한데 엄마 특유의 반응이기도 한 그 반응을 엄마는 보여주었다. 친구 집에서 똥을 싸고 닦았는데 피가 묻어있었더라, 생리 시작한 것 같아.라고 말한 나를 보며 엄마는 “뭐어? 으이그~ 진짜~”하며 약간은 짜증이 나있으면서도 걱정하고 귀찮은 일이 생긴 듯한 뉘앙스로 눈을 흘겨보면서 화장실에 들어가 엄마가 사용하는 생리대를 꺼내 주었다. 이걸 쓰면 된다고 했다. 이제 힘들 텐데 어떡하냐 같은 말을 들었던 것도 같지만 어쨌든 짜증 난다는 반응이 크게 기억에 남는다.

생리대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엄마는 알려주지 않았던 것 같다. 알려줘도 대충 알려줬나 보다. 나는 이렇게 하는 건가? 저렇게 하는 건가? 생리대 겉 포장지의 설명을 꼼꼼히 읽어보며 그림을 확인하며 이해하고 착용했다. 새로운 세계였다. 신기하기만 했다.

더 이상의 자녀계획이 없는 나는, 필요가 없으니 폐경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자주 했다. 아이를 낳고 말이다. 이젠 더 이상 의미 없는 아기집을 내 몸은 왜 만들고 또 허물고 하는지, 왜 한 달에 한 번씩 이걸 겪어야 하는지 참 불편하다고 생각했다.  얼마 전 교회를 통해 알게 된 아이 엄마 들과 사모님과 생리에 관해 잠깐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사모님과 다른 한 아이 엄마가 생리의 순기능, 그러니까 몸이 한 번씩 노폐물을 스스로 배출해내는 것에 대해서 언급했었던 게 내 딴에는 굉장히 낯설고 이상하고 억지스럽게 느껴졌었다. 터무니없는 말처럼 느껴졌고 좋게 생각하려고 애써서 그런 말이 나온 것처럼 어울리지 않게 다가왔다. 그런데 최근에 생리에 관한 주제가 잠깐 글쓰기 강의에서 나왔을 때 비슷한 말을 선생님이 해주신 것을 듣고 내가 놓치고 있는 게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의 영향도 있겠고, 여자들과 생리에 관해 이야기하면 불편한 이야기들 뿐이어서, 전혀 생리가 귀하게 느껴지지 않았나 보다. 생리불순과 주기 불규칙으로 석 달에 한번, 여섯 달에 한번 생리를 한다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 속으로 부러워했고, 한 번 생리할 때에 양이 적고 이틀 삼일 만에 생리가 끝난다는 이야기도 너무 부럽기만 했다. 생리에 대해서 나는 그냥 귀찮고 귀찮고 귀찮은 느낌뿐이었다.

내 경험에서 생리 때 좋은 게 있었다면, 이게 좋다고 표현하기는 어색하지만 나쁜 느낌은 아닌 묘한 반가움 같은 게 있었는데, 생리 중 씻을 때마다 핏덩이가 샤워기의 물줄기를 따라 하수구 구멍으로 흘러들어 가는 것을 멍 때리며 보게 되는 거였다. 그럴 때마다 나는 “춤추는 핏덩이”라고 중얼거렸고 읊조렸다. 흔들흔들거리면서 하수구로 흘러내려가는 핏덩이가 춤을 추는 것처럼 보였다. 가끔 씻을 때 핏덩어리가 보이지 않으면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생리대를 착용하고 앉아있다가 일어설 때 왈칵 따뜻한 굴이 밑에서 쏟아지는 듯한 느낌은 육성으로 윽! 하고 소리가 나기도 하고, 자제하더라도 얼굴이 저절로 일그러지는 느낌이었지만 물과 만난 핏덩이를 마주하면 괜히 귀엽고 반가운 것이었다.

또 하나는 면생리대를 사용하면서 느낀 건데, 찬물로 애벌빨래를 해둘 때에 말갛게 우러나는 핏빛에 기분이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엄마 아빠와 같이 살 때 면 생리대를 사용한 적이 있었다. 짓무름도 덜하고 생리통도 줄고 새는 일도 없어서 면생리대를 사용했었고 매일 애벌빨래를 하고 세제에 담가 두어 다음날 세탁을 했었다. 대야에 애벌로 빨아둔 생리대 여러 장을 세제에 담가 두었는데 엄마가 보더니 치우라고 했다. 왜냐고 물으니 아빠가 보면 안 된다는 거였다. 나는 의아했고 불쾌해서 엄마한테 짜증을 내며 말했다. 이게 더러운 것도 아니고 내가 똥오줌을 싼 것도 아닌데 왜 보면 안 되는 거냐고 했다. 엄마는 별말은 없었지만 돌이켜보니 내가 생리 시작했다고 말했던 그때의 표정을 지었던 것도 같다. 정작 아빠는 말이 없었는데 말이다. 뭐, 아빠가 엄마에게 말하고 그걸 나에게 전해준 걸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게을러서 손빨래를 지속하기가 어려워 다시 시중에서 파는 일회용 생리대를 사용하게 되었지만 그때 면생리대를 빨면서 핏물이 나오는 걸 보는 게 괜히 맑아지는 그 느낌이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드물지만 생리 시작하면 부모님이 축하해주고 파티해준다는 말을 들었을 때 진짜 놀라웠다. 처음엔 굳이 뭐 그게 축하할 일인가?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이제와 생각해보니 첫 생리를 그렇게 경험한다면 보통 30년 정도 계속하게 될 생리를 할 때마다 나보다는 불쾌한 기억이 덜 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조만간 또 생리가 시작될 텐데 지금부터 경험하는 생리는 새롭게 다시 경험해보길 바란다.


2020.9.2.


작가의 이전글 내가 옆에 있어줄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