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부터.
도서관에서 책을 반납하고 돌아 나오는 길이었다. 한낮에 그것도 그늘도 아닌 땡볕에 학교 책가방을 뒤로 메고 실내화 주머니를 옆에 두고 길가에 털썩 쪼그려 앉아 시무룩하게 앉아있는 초등학생 여자 아이를 지나쳤다.
‘무슨 힘든 일이 있었을까.’
‘그늘에라도 가서 쉬지. 땡볕에서...’
‘집에 들어가기 싫었던 걸까. 그 시절의 나처럼.’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들어가던 길. 나는 항상 마음을 졸이며 귀가했다. “아빠가 집에 없었으면 좋겠다.” 하면서 떨리는 마음으로 집으로 들어갔다. 아빠가 있을 때의 집안은 공기부터가 확연히 달랐다. 담배연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빠는 일일노동근로자다. 새벽에 일을 나가시고 일이 없으면 낮에 집에 계시며 술을 마시고, 일을 마치고 나면 늦은 밤 술에 취해 집으로 들어오셨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왜 맨날 혼나야 했는지 말이다. 아빠 입장에서 혼내는 명분은 있었겠지만 아마도 화풀이 아니었을까 싶다.
나는 초등학생 저학년즘이었고 남동생도 아마도 초등학생이거나 혹은 그보다 더 어렸을 거다. 그날 밤도 아빠는 술에 취해있었고 화가 나있었다. 엄마와 아빠는 큰 소리로 싸웠다. 얼마나 싸우는 모습을 많이 봤는지 싸우는 모습이 그렇게 인상 깊게 남지도 않는다. 매번 똑같다. 술을 마신 아빠는 화를 내고 엄마는 지긋지긋하다며 술 마셨으면 곱게 자라고 했다. 아빠는 물건을 던지거나 욕을 퍼붓거나 애꿎은 우리를 불러 훈계를 했고 엄마는 애들은 자게 좀 놔두라고 했다. 그러다 벌어진 일이겠지.
엄마는 나와 남동생에게 나가서 숨어있으라고 했다. 엄마가 일러준 곳이 거기였는지 나와 남동생이 생각해낸 곳이 거기였는지 옆집 아줌마가 이리 오라고 손짓해서였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옆집 연탄광 안에 들어가 숨어있었다. 한 지붕에 한 마당, 한 화장실을 두고 우리 집과 옆집이 살고 있던 작은 집이었다. 연탄광 안은 캄캄했고 몰래 내다본 옆집 부뚜막 위에는 옆집 아이 실내화와 운동화를 말리기 위해 세워 놓은 것이 보였다. 주말이었나 보다. 옆집에서는 티비소리가 들렸던 것 같기도 하다.
‘한나야’
‘한나야’
술에 취해 내 이름을 부르는 아빠의 목소리. 분명 화가 머리 끝까지 나셨다. 걸리면 죽겠다 싶었다. 그리고 결국 걸렸다. 아빠가 옆집 연탄광 문 뒤에 숨어있는 우리를 발견하고는 사정없이 뺨을 갈겼다. 뺨을 맞았는데 머리 전체가 깨지는 것만 같았다. 불렀는데 왜 나오지 않느냐는 것이 아빠의 첫마디였다. 고개를 들어보니 옆집 아저씨와 아줌마, 그리고 옆집 친구가 우리를 보고 있었다. 아빠는 맨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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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기억이나 할까. 아마 못 하시겠지. 설령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해도 기억 안나는 척하시겠지. 이제 와서 엄마는 아빠와 저녁을 먹고 티비를 보며 과일을 깎아 드시며 웃으며 얘기하신다. ‘야, 느그 아빠 옛날엔 사람도 아니었어.’ 아빠는 슬쩍 웃으며 티비로 눈을 돌리신다. 남동생과 나는 앞다투어 이야기한다. 아빠가 이랬던 거 기억나? 이런 일도 있었잖아. 하면서 말이다. 이렇게, 웃으며 하는 이야깃거리로 되어버린 지금, 해피앤딩이 된 걸까.
여러 차례 곱씹었던 이 날의 기억을 꺼내어 글로 옮기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고 안절부절못하며 풀어내는 걸 보니 이건 해피앤딩은 아니다. 아빠에겐 미안한 얘기지만, 잊히길 원하는 과거의 한 페이지겠지만, 난 아니다. 이전처럼 술을 드시고 폭력을 행사하지 않지만 그래서 다행이지만 그렇다고 이전의 일들이 씻긴 듯이 나아지는 것은 아니다. 그냥 그대로 있다. 버젓이. 그 이야기는 살아서 아직도 내게 말을 걸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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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를 이해하려고, 엄마를 이해하려고 부단히 애썼다. 이제 그만하고 싶다. 이제는 내가 내 옆에 있어줘야겠다. 지금의 내가 그날의 나와 마주한다면 나는 무얼 해줄 수 있을까. 그냥... 옆에 있어줘야겠다. 말없이. 덜 무섭게. 덜 외롭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