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액젓 — 깊은 배려는 눈에 띄지 않는다
✒️ 정담훈 (Jung Dam-Hoon)
오늘 꺼내볼 양념 : 액젓
김치가 김치다워지는 순간은 언제일까.
붉은 고춧가루가 눈길을 끌고, 마늘과 생강이 향을
퍼뜨려도 무언가 빠지면 금세 허전하다.
속 깊이 스며든 액젓이 없으면 김치는 겉모습만
그럴듯할 뿐, 시간이 지나도 깊은 맛으로 익어가지
않는다.
쌈장을 찍어 먹을 때도 비슷하다.
된장의 구수함, 고추장의 칼칼함이 먼저 다가오지만
입안에 오래 남는 건 액젓의 은근한 짠맛이다.
보이지 않는 그 맛이 없었다면
쌈장은 금세 느끼해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그 존재를 알면서도
일부러 드러내지 않는다.
‘있으나 없으나 같은 것’이 아니라
‘있어야만 비로소 완성되는 것’ 임을 알기 때문이다.
국물 요리도 그렇다.
속 풀리는 해장국, 칼칼한 찌개의 뒷맛을
끝까지 잡아주는 건 액젓 한 숟갈이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도
맛의 무게를 붙들어주는 은근한 힘.
찬물에 스며드는 소금처럼, 액젓은 조용히 퍼져
모든 맛을 하나로 이어준다.
사람 사이의 배려도 닮았다.
큰 제스처보다 더 오래 남는 것은 아무 말 없이 건네는
작은 행동들이다.
말로는 표현되지 않아도 그 순간을 지켜주는 눈빛,
묵묵히 대신해 주는 손길, 잠시 기다려주는 침묵.
이런 것들이 관계를 발효시키고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맛을 만든다.
우리는 가끔 억울하다.
“왜 늘 내가 더 챙기기만 하지?”
“아무도 내 마음을 몰라주는 걸까?”
하지만 배려는 본디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
눈에 띄지 않는 자리에서조차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마음, 그것이야말로 진짜 배려다.
마치 액젓이 김치 속에서 시간을 견디며 발효를 돕듯,
보이지 않는 마음은 결국 가장 깊은 곳에서 관계를
지탱한다.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
인생을 맛있게 만드는 건 거창한 사건이 아니라는 것을.
한 숟갈의 짠맛이, 한 줌의 무심한 배려가, 삶 전체의
맛을 바꿔놓는다.
김치가 발효될수록 깊어지듯, 사람 사이의 믿음도
보이지 않는 배려에서 자라난다.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요란한 말보다 오래 남는 뒷맛,
눈에 띄지 않아도 사라지지 않는 무게,
시간이 지날수록 드러나는 은근한 힘.
국물의 마지막 깊이처럼 다시 떠올리게 되는 사람.
오늘도 나는 액젓 같은 마음으로
누군가의 삶에 숨어든다.
그가 모르는 사이, 조금 더 단단히 버티도록.
그가 알아차리지 못해도, 한 숟갈의 짠맛이 되어
그의 하루를 지탱하리라 믿으며.
깊이를 남기는 건 언제나 보이지 않는 것,
인생의 국물도 그렇다.
그리고 언젠가, 그 국물을 떠먹는 순간
비로소 우리는 깨닫게 될 것이다.
누군가의 조용한 마음이
내 삶을 지켜주고 있었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