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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이 Dec 26. 2021

(2) 이별을 겪다

아이에게 들려주는 아빠의 이야기

교통사고였다. 하루에도 2번, 3번씩 오가는 길이었다.

사촌 형은 그 길에서 30대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우리 집에 눌러살던, 가족이었던 사촌 형은 그렇게 마지막 인사도 없이 우리 곁을 떠났다.


억울한 사고였다. 짐을 가득 싣고 있던 트럭은 중심을 잡지 못하자 맞은편에서 오던 형의 차로 핸들을 돌렸다. 본능이라고는 하나 자신의 삶을 위해 상대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아무도 용서하지 않았으나 바뀐것은 없었다.     

초등학생 5학년이었던 그 시절 준비되지 않은 이별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어쩌면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화장장으로 들어가는 그 순간까지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장례절차가 모두 끝난 뒤에야 현실을 깨달았고 눈물은 그칠 줄 몰랐다.


마지막 인사를 했다면 달랐을까. 사촌 형이 죽고 난 2년간 가끔 거리를 걸을 때면 장난처럼 흰색 포터를 타고 동네 길을 운전해 올 것이라, 검은색 비닐봉지 가득 후레시맨 비디오를 들고 웃어 보일 것이라 기대했다.

     

그해 이별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할머니가 돌아가셨고, 큰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폭풍우가 몰아치듯 찾아오는 이별은 계속됐다. 큰아버지의 영정사진을 들고 생전의 방을 한 바퀴 돌고서 눈물을 쏟았고, 숨이 멎은 할머니의 손을 잡고 한참을 앉아 기다렸다. 이별의 방식은 언제나 달랐지만 가슴을 죄어오는 아픔은 언제나 같았다.


사람을 떠나보내는 것은 그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가르침을 준다고 이해할 수 있을 나이도 아니었으며 나이가 들어서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여전히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가 끝나는 것이 두려워 영원히 마주할 수 없는 ‘이별’은 무서운 단어로 남아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뒤 슬픔이 무뎌질 때쯤 깨달았다. 떠나간 뒤엔 그 무엇도 남아있지 않는 것이 아니라 기억 속에는 영원히 남는다는 것.     

대학에 입학했을 때, 첫 직장을 잡았을 때, 결혼했을 때, 아이가 태어났을 때 할머니가 살아계셨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생각했다. 성인이 되어 며칠 자르지 못한 수염이 까슬까슬해질 때면 늘 나에게 수염으로 얼굴을 비비던 사촌 형이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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