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에게 들려주는 아빠의 이야기
아이가 태어나기 전까지 알지 못했다.
9년이라는 긴 연애 끝 결혼을 했고 상상 속에서 미래의 아이를 그렸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상의 존재였다.
누군가 말했다. 아이가 생기는 것은 하나의 새로운 세상이, 세계가 오는 것이라고.
아내가 아닌 가족이 더해진다는 것은 막연했다. 사실 기자라는 직업을 갖고 있는 상황에서 끊임없이 경쟁하고 싸우느라 ‘아이’라는 존재는 우리라는 생활의 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그러던 중 상황이 변했다. 결혼 후 6개월 만에 나는 직장을 옮겼다. ‘가족계획’이라는 것을 했다.
아니나 다를까 곧이어 아내가 처음 임신을 언급했다. 머리가 아프다고도 했고 잠이 쏟아진다고도 했다. 이제 막 직장을 옮겼던 그 시절 아내를 혼자 타지에 두어야 하는 막막함에 걱정과 설렘이 공존했다. 하지만 1주일이 지난 뒤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났다. 감기 기운이었다.
1년이 지난 시간까지 아이는 우리를 찾아오지 않았다. 10년에 가까운 연애, 임신은 어찌 보면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결혼 한 뒤에는 우리에게는 쉽게 찾아오지 않는 미지의 대상이 됐다.
서로를 탓하고 고민하기보다는 서둘러 병원을 찾았다. 서로의 문제없음을 확인하고서야 걱정을 내려놓았고 거짓말처럼 아이는 곁으로 찾아왔다.
물론 지난 1년의 시간 동안 걱정 없었던 것은 아니다. 주변에서 한 번씩 건네는 아이의 존재를 물어보는 질문은 대답을 난처하게 했다. 나도 모르게 결혼한 지 얼마 안 됐다던가, 이직한 지 얼마 안 됐다는 변명 아닌 변명을 해야 했다. 부부가 된다는 것이 아이를 가져야 하는 당위 명제와 같은 것이 아님에도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질문은 일상이었다.
궁금하지 않은 임신 방법을 늘어놓는 사람도 있었고, 주기적으로 같은 질문을 반복하는 이도 있었다. 관심의 표현이라고, 애정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기엔 기분은 더러웠다.
잠깐의 시간이었지만 임신이 어려운 부부가 어떤 따가운 시선을 안고 살아가는지도 체험하는 시간이었다. 하지 않는 것 과 하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도 컸다. 게다가 하지 못하는 것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 고통은 더 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임신이 축복이지만, 단순히 축하의 의미가 담겨있는 말로 10개월을 모두 표현하긴 어렵다. 혹독한 입덧을 겪었고, 조기진통, 임신소양증 출산하는 그날까지도 아내를 괴롭히는 숙제는 이제 막 캐릭터를 생성한 RPG 게임처럼 끊임없었다.
12월 10일 우리는 둘에서, 셋으로 가족이 한 명 더 늘었다. 물론 육아는 이제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