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에게 들려주는 아빠의 이야기
인생 첫 일자리는 20여 년 전 고등학교 1학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내가 자란 고장은 인구 3만이 채 되지 않은 작은 시골이었다. 심지어 내가 태어난 곳은 작은 군 단위 지역에서도 차로 30분가량 들어가야 했다. 하루 6대 밖에 들어오지 않는 버스를 타고 나가야 했기에 나의 첫 직장(알바)에 가기 위한 여정은 시작조차 어려운 일이었다.
일요일 아침 읍내서 가장 붐비는 예식장이 바로 나의 첫 일자리였다. 8시까지 출근해 오후 5시면 끝나는 스케줄로 일당 3만 원 짜리였다. 뷔페 음식을 나르거나 청소하는 잡일이었다. 일하는 아주머니들과 친해지기도 했고 남은 치킨을 구석에서 같이 일하는 친구들과 나눠 먹기도 했다. 특별할 것 없었지만 나에겐 소중한 일자리였고, 내가 돈을 번다는 사실이 기쁘기도 했다.
나쁘지 않았던 처음의 기억은 이후에도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경험하게 했다. 콘도, 학원, 도로 도색, 공장까지 대학 졸업 후 첫 직장을 얻기 전까지 다양한 일을 했다.
군 전역 후 공장에서 일할 때였다. A정수기 회사에서 일했지만 내 소속은 하청업체였다. A공장에서 일하고 있었지만 B업체 소속으로 임금체계도 근무복도 달랐다. 당시 뉴스에서 하루 종일 떠들어 댔던 하청업체 논란이, 비정규직 노동자가 바로 나였다. A회사의 지시를 받아하기 싫은 특근을 하며 아침 8시 출근 저녁 10시 퇴근이 반복됐다. 항의하지 못했다. 특근은 사실상 강제였다. 뉴스 사회면에서나 보던 일상이 내 삶으로 들어온 순간이었다.
아스팔트 도로 도색 일을 할 때였다. 소위 공사판은 주말이 따로 없다. 도로 도색은 비, 눈 오는 날은 일하지 못하기에 궂은 날씨가 아니면 항상 출근해야 했다. 그러나 7~8월 내리쬐는 태양을 일주일 내내 받아낼 용기가 없었다. 일요일은 쉬겠노라 선언했다. 이유를 만들었다. 교회를 가야 한다고 둘러다.(실제 당시엔 교회를 다녔다) 그 뒤로 그 직장에서는 나를 ‘예수’로 불렸다. 일요일이면 예수 만나러 가야 한다며. 날 것의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학창 시절의 날것이 그곳엔 여전히 그대로 있었다.
넉넉하지 못한 형편에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지만 지나온 많은 시간이 단순히 돈을 버는 행위에 그치지는 않았다. 단순히 목적이 돈이었다면, 돈을 버는 것에만 그쳤다면 그 순간순간을 버티기 어려웠을지 모른다.
일을 통해 내 삶에서 섞이기 어려운 많은 사람을 만났고, 다양한 삶의 군상을 경험했다. 일당 10만 원짜리 일을 하며 크라이슬러 중고차를 몰고 다니던 도로 도색 형, 부사관으로 전역 후 공장을 다니며 미래를 설계했던 누나, 서울 귀퉁이서 작은 학원을 운영하다 노원 은행사거리로 진출한 학원 사장님까지.
일은 돈을 벌기 위한 나의 모든 것이기도 했지만 항상 그것이 전부가 아니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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