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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랜더 선택 가이드

가격만큼 하는 제품

by 강상욱

요리사 생활을 하다 보면 요리를 전혀 해본 적이 없는 의사결정자를 설득시켜야 할 때가 많다. 특히나 빈번하게 발생하는 경우는 비싼 조리기구를 구입해야 할 때다. 당연히 비싼 기구를 사면 좋은 요리가 효율적으로 나온다. 특히 몇천만 원에 가까운 오븐이나 억에 가까운 금액을 자랑하는 자동화 기기등은 공간의 활용도 내지 그 효율성에서 꼭 필요한 경우가 대부분이라서 어떻게든 설득이 가능하다. 문제는 블랜더 같이 일상생활에서 간단히 사용할 수 있는 저가형 제품과 셰프용의 고가형 제품이 혼용돼서 사용될 때 이다.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보자. 당신이 호텔을 운영하는 운영자인데 한 요리사가 와서 300만원 짜리 블랜더가 필요하다고 한다. 이유는 잘 설명하지는 못하는데 아무튼 중요한 제품이니 꼭 사줘야 한다고 한다. 이 블랜더를 사용하면 요리가 퀄리티 있게 나온다고 한다. 그런데 얼마나 퀄리티 있게 나오는지는 잘 설명을 못한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300만원은 비싼 거 같아서 인터넷을 뒤져보니 상위 검색되어 있는 '그럴듯하게 보이는' 블랜더가 5만원이면 충분하게 구입이 가능하다. 이 경우 당신은 미심쩍은 감정을 접고 300만원에 가까운 블랜더를 사줄 수 있겠는가?


쿠팡에서 검색을 하니 4만원대의 블랜더가 1위로 뜬다. 그런데 브랜드도 테팔이다!


불행하게도 내가 설득시켜야 했던 분들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았던 거 같다. 사실 이해가 충분히 된다. 블랜더가 좋아봤자 식자재를 조금 더 부드럽게, 그리고 안정적이면서도 편하게 음식이 나오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300만원이 되는 블랜더의 필요성을 요리의 문외한들에게 제대로 설명시키기 힘든 것이다. 게다가 5만원 짜리 블랜더로도 어떻게든 음식의 퀄리티가 나오긴 한다. 문제는 겨우 몇 번 사용한 블랜더가 한계 지점까지 혹사당하여 고장이 쉽사리 난다는 것이다. 일반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블랜더의 사용 횟수 및 시간이 훨씬 많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잘 갈리지 않은 재료를 채에 억지로 내리고 다시 한번 더갈아야 하는 일도 생긴다. 모터가 타는 냄새가 나서 사용할 때마다 스트레스를 강하게 받는 것은 덤이다. 모터가 고장 난 블랜더의 수리비는 신품을 구매하는 게 더 좋을 정도로 비싸다.



고급 블랜더가 왜 필요할까?


왜 고급 블렌더가 필요한가에 대한 이야기를 천천히 해보자. 우선 좋은 블랜더의 최대 장점은 식자재를 '곱게 갈아준다'는 점이다. 이게 뭐가 큰 장점일까?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적어도 서양 고급요리를 지향하는 곳에서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흑백요리사로 유명해진 파인다이닝(fine dining)을 하는 곳 말이다.

서양요리에서 퓌레등의 부드러운 질감은 매우 중요하다. 사람의 혀는 10 마이크로미터(0.01mm) 미만의 입자를 감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보다 곱게 갈아서 만든 요리는 식감이 매우 부드럽고 실크처럼 매끈하게 느껴진다. 거기에다가 파인다이닝 요리사들은 다 갈아진 식재료를 가는 채에 걸러서(다 갈아진걸 굳이 한번 더?) 입자 크기 컨트롤을 추가적으로 해준다. 혹시라도 부드러운 감촉을 방해할 수 있는 섬유질등을 꼭 제거하는 작업인 것이다. 고급 블랜더를 사용하면 균일하고 작은 입자가 만들어져 부드러운 질감을 느낄 수 있고, 또 퓌레나 수프등을 채에 거르는 작업의 속도가 눈에 띄게 증가한다.


고급 믹서기의 대명사 Thermomix. 아예 안 써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써본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겨우 곱게 가는 거 하나 때문에 몇백만 원을 써야 하는가?'라는 의문이 들 수 있다. 하지만 좋은 블렌더의 장점은 단순히 ' 곱게 갈린다'에 그치지 않는다. 가장 큰 차이는 '확실성의 담보'와 '시간의 효율성 증가'이다.
확실성이라는 건, 얼음을 넣든, 해동되지 않은 냉동 과일을 넣든, 심지어 단단한 견과류를 넣더라도, 언제나 결과가 일정하게 나온다는 뜻이다. 음식의 결과물이 예측 가능하다는 건 주방에서 굉장히 중요한 요소다.

그리고 시간의 효율성 증가는 단순히 위에서 이야기한 수프등을 채로 거르는 시간 단축뿐만이 아니다. 좋은 블랜더를 사용하면 식자재를 넣고 돌린 후 일정시간 동안 칼질등의 다른 작업을 진행할 수 있다. 단순히 버튼을 누르면 일정한 시간 안에 원하는 질감으로 완성된다. 중간에 뚜껑을 열고 확인하거나, 재료를 휘젓거나 입자의 크기등을 확인할 필요가 없다. 그 몇 분을 아끼는 게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수십 개의 요리를 동시에 준비해야 하는 주방에서는 그 몇 분이 몇 명의 인건비와도 직결된다. 하지만 저가형 블렌더를 사용한다면 일정 시간이 지나면 모터가 과열되어 블랜더가 조리 중간에 멈춘다. 혹은 식자재등이 걸려서 힘들게 모터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다른 요리를 하다가도 신경 쓰여서 그 앞을 떠나기가 힘들다. 그 블랜더는 더 이상 사람의 노동을 줄여주는 기계가 아니라 나의 신경을 하나 더 쓰게 만드는 비효율적인 조리도구가 된다.

마지막으로 좋은 블렌더는 ‘불안감’을 없애준다. 만일 블랜더에서 모터에 탄 냄새가 올라온다. 소리가 이상하지는 않은지, 부하가 너무 걸리지는 않는지, 갑자기 꺼지는 건 아닐지 걱정된다. 그래서 이걸 AS를 보낼지 말지를 고민하게 만든다. 그런 걱정을 하며 쓰는 장비는, 이미 주방 안에서 리스크로 작용한다.

물론, 이런 이야기를 아무리 해도 "결국은 돌아가는 모터 하나인데 왜 몇 백을 써야 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래서 나는 항상 이렇게 말한다. "그 블랜더 하나가 주방의 효율을 바꿀 수 있고, 그렇게 된다면 그건 그냥 블랜더가 아니라 주방의 인력을 개선할 수 있는 시스템의 일부입니다."



블렌더를 고르는 기준


좋은 블랜더를 고르는 기준은 무엇일까? 그것은 내가 얼마나 '자주, 무엇을, 얼마나 많이' 갈 것인가에 달려 있다. 예를 들어 아침에 과일 한두 개 갈아 마시는 주부가 있는가 하면, 업장에서 하루에 수백 명의 수프와 퓌레등을 갈아야 하는 요리사도 있다. 이 경우는 당연히 같은 블렌더를 쓸 수는 없다.



와트(마력), RPM, 디자인 그리고 가격

이것이 좋은 블랜더를 고르는 기준의 거의 전부이다.


와트(마력)는 말 그대로 ‘힘’이다. 단단한 재료를 얼마나 강하게 갈 수 있느냐는 ‘출력’에 달려 있다.

1500와트 이상이면, 견과류, 얼음, 냉동 과일을 스트레스 없이 갈 수 있다. 일반적으로 와트가 높아질수록 제품의 소음이 커진다고 보면 된다.

RPM은 ‘속도’다. 분당 칼날이 몇 번 회전하는지를 뜻한다. 회전 수가 많을수록 재료가 더 부드럽게, 더 빠르게 갈린다.

디자인은 개인 취향이 많이 반영되는 요소이다.

몇 년 전 나에게 블랜더를 물어보는 주분 한분이 계셨다. 나는 당연히 고가의 Vitamix 제품을 추천하였지만, 사진을 보시더니 미묘한 불만족을 표하셨다. 나는 단순히 제품의 내구성과 기능으로만 판단하였지만, 주부의 입장에서는 가격은 비싼데 디자인이 너무 투박하고 옆에 놓고 사용하고 싶은 느낌이 나는 제품이 아니었으니까 그러셨을 것이다.

항상 설명을 잘 읽어봐야 한다. 3D 칼날기술 이런 마케팅 문구에 현혹되지 마라


마지막으로 가격은 이 모든 것이 총합된 요소이며 추가적으로 이 제품을 얼마나 안정적으로, 그리고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모터의 내구성, 과부하 보호 장치, 열 차단, 진동 제어, 칼날의 내구성 및 품질, 브랜드 A/S 등에서 생긴다. 개인적인 생각에 블랜더의 가격은 전반적으로 매우 솔직하고 정직하다. 가격이 비싼 제품의 대부분은 힘과 속도가 좋고 칼날 크기도 크며 내구성이 좋다. 가격이 저렴한 제품은 힘과 속도가 낮고 칼날 크기도 작은 편이다.



와트와 마력의 환산


참고로 블렌더에서 말하는 ‘마력(HP)’과 ‘와트(W)’는 서로 환산이 가능하다. 1마력은 약 746와트니까, 2마력의 블렌더는 대략 1,500와트 이상의 출력을 가진 제품이라고 보면 된다. 만약 2.5마력짜리 블렌더라면 약 1,860와트, 3마력대라면 2,200와트가 넘는 셈이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점이 하나 있다. 대부분의 고급 블렌더들이 강조하는 마력 수치는 ‘최대 피크 출력’, 즉 아주 짧은 순간 낼 수 있는 최고 수치다.

실제로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조리 과정에서는 이보다 조금 낮은 ‘지속 출력(Continuous Output)’이 기준이 된다. 그래서 어떤 블렌더는 “3.8마력”이라고 광고하지만, 실제로는 1.5마력 수준의 지속적인 힘을 낼 수도 있다는 소리다. 역시 어디에서든 과대광고는 조심해야 한다. 결국 가장 믿을 수 있는 기준은 ‘정격 소비전력’, 즉 와트 수치다. 1,500~2,000와트 이상 제품이라면, 전문 조리 환경에서도 안정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RPM이 높으면 파워도 높다?



RPM은 ‘얼마나 빨리 도는가’이고, 마력은 ‘얼마나 강하게 도는가’이다. 그런데 당연히 빨리 도는 제품은 힘이 강한 거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크게 상관이 없다. 예를 들어보자. 누군가 자전거 페달을 엄청 빠르게 밟지만, 체중이 실리지 않아 언덕은 오르지 못한다. 다른 사람은 천천히 밟지만, 힘이 좋아 무거운 짐도 끌 수 있다. RPM이 높은 블렌더는 부드러운 재료는 빠르게 갈 수 있지만, 얼음이나 견과류 같은 단단한 재료에서는 금방 멈추거나 탄내가 나기 쉽다.

반대로 마력이 높은데 RPM이 낮으면 단단한 재료는 갈지만, 질감이 거칠거나 시간이 오래 걸릴 수 있다.

재미있는 점은 RPM이 비교적 높으면서 파워가 낮은 블랜더는 꽤나 많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볼 수가 없다는 점이다. 모터의 구조상 속도를 올리기는 비교적 쉬운 편이지만 와트를 올리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가형 블랜더들은 'RPM 20,000 이상!' 이런 식으로 강조를 한다. 속으면 안 된다.




요약하자면

스무디나 과일만 한 달에 한두 번 갈아먹는다면 600W, 5만 원대 제품으로도 충분하다. 나 조차도 집에서는 이런 제품을 사용한다.

매일 같이 스무디를 갈아먹어야 한다면 1,000~1,200W, 15,000 RPM 정도를 추천한다. 10~20만 원대 제품이 많이 보일 것이다.

프로 셰프 용을 원한다면 1,500W, 20,000 RPM 이상을 추천한다. 여기부터는 가격이 천차만별이다.

매일 쓰고, 장비를 오래 쓸 생각이라면 브랜드와 내구성, 소음, A/S까지 따져야 하고 그만큼의 가격이 상승된다. 특히 회자되는 몇몇 브랜드의 내구성은 정말 놀라운 수준이지만 가격도 그만큼 비싸다.


나는 좋은 칼은 손에 익기까지 시간이 필요하지만, 좋은 블렌더는 처음부터 그 가치를 증명해 보인다고 생각한다. 블렌더가 사치품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효율을 위한 가장 정직한 투자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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