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꺼이 B급

『B급좌파』의 무등에 올라타서

by 동사로 살어리랏다

보수적인 부모는 당당한 얼굴로 아이를 경쟁에 내몰고 진보적인 부모는 불편한 얼굴로 아이를 경쟁으로 몰아 넣는다. 보수적인 부모는 아이가 일류대 학생이 되기를 바라고 진보적인 부모는 아이가 진보적인 일류대 학생이 되기를 소망한다.

김규항, 『B급좌파』




『B급좌파』는 김규항이 2001년 첫 출간, 2005년 『나는 왜 불온한가』라는 제목으로, 다시 2010년 『B급좌파_세번째 이야기』로 10년간 쏟아낸 시리즈 입심이다. 이 시리즈 포함 십 여권의 책을 펴내고 강의했으니 어디다 비길 데 없는 독보적 입심이다. 신의 경지다.



나는 모른다, 고로 쓴다

그의 글에 강한 공명(共鳴)을 느낄 수 있는 것은 내용도 내용이지만, 그의 글쓰기와 삶에 대한 태도가 공명을 자아낸다.


나는 글의 소재를 얻기 위해 세상을 들여다보는 게 아니라 세상을 들여다보기 위해 글을 쓴다.


흔히들 그렇게 알고 있지만, 글읽기는 세상을 알아가는 과정이고 그 과정을 충분히 소화한 후 비로소 그 결과로 자신의 글이 쓰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나도 그랬던 적이 있었음을 부인하지 않겠다). 그러나 김규항은, 글쓰기란 세상을 터득했고 그 깨달은 바 ‘내 이르노니’가 아니라 현실의 밑바닥을 가감 없는 눈으로 읽고 씀으로써 비로소 세상의 이치를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한다. 이렇듯 김규항의 글은 나와 부딪히며 부대낀, 살아있는 생생한 글이기에 공명되는 것이다.


나는 이오덕 선생이 말씀한 “삶을 가꾸는 글쓰기”를 믿는다. 모름지기 글은 그런 것이라고 믿는다. 글을 씀으로써 내 일상의 에피소드들은 비로소 내 생각으로 정리되며 그렇게 정리된 생각들은 다시 내 일상의 에피소드에 전적으로 반영된다. 내 삶과 내 글은 끊임없이 꼬리를 물고 순환한다. 내 삶을 더 낫게 만들지 않는다면, 나라는 인간을 더 낫게 만들지 않는다면, 내 글은 아무것도 아니다.


글을 씀으로써 비로소 생각을 정리하게 되며, 그렇게 정리된 생각들이 다시 현실에 반영되고, 다시 쓰고 반영되는 순환. 모르기에 쓰는 것이고 쓰는 것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그러므로 ‘내 삶을 더 낫게 만들’기 위해서 아무나, 누구나 써야 한다 – 고귀한 글쓰기를 너나 나나 아무나 다 쓰다니, 과연 B급이로세.



기꺼이 B급 좌파

『B급 좌파』는 일상과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하지만, 거대담론으로 포장 또는 치부되어 다루기를 꺼려하거나 누군가에 의해 교묘하게 숨겨져 있는 것들을 쓴 책이다.


민주, 자본, 전체주의, 독재, 진보/보수, 권위주의, (신)자유주의, 소수자, 약자, 대중의 습속, 교육, 공정, 환경


김규항이 다루는 ‘일상적인’ 글쓰기 소재들이고, 이런 일상에 살면서 어떻게 먹고살아야 더 낫게 사는 것인지 반성적으로 반영했다.


날라리의 영역인 록음악에 깃발을 꽂고 주인 노릇을 하는 모범생들 욕


그는 ‘모범생’인척 하는 ‘날라리’들을 ‘욕’하면서 영화 주간지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글을 쓰기 시작할 때의 저 지향점이 평생 계속된다. 록음악에서 시작했지만 삐뚤어지고 망가지고 변태가 된 모든 지배권력에 대해 ‘욕’한다. (김규항이 왜 록음악을 날라리 영역이라 표현한 지는 김규항 본인의 글에서도 알 수 있지만, 필자의 다른 글 ‘단 하나의 오리지널리티’의 테마 서적 『전복과 반전의 순간』을 참조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위와 같은 소재를 저와 같이 ‘욕’하면 좌파로 가는 고속도로를 탄 것이다 – 그래서 ‘좌파’


그런데 김규항은 좌파를 참칭 하지만 변절하고 변질된 주류 좌파를 ‘강단 좌파’, ‘개혁 우파’ 등으로 표현하면서 우파 못잖게 욕한다. 그런 좌파를 ‘주류-A급 좌파’로 보는 것이다. ‘모범생’ 노무현, 유시민은 말할 것도 없고, 극우가 ‘빨갱이’, ‘간첩’이라고 칭하는 문재인도 모두 주류-A급 좌파가 된다. (이들이 왜 변절자고 변질된 자들인지 궁금하겠지만 조금만 참아달라. 아래에서 김규항의 주장을 정리해 보겠다.)


또한 김규항은 비리 권력과 변질 세력을 목청 높여 성토하면서 ‘나보다 더한 놈을 욕함으로써 내 문제를 면피하려는 태도’를 가진, 진보입네 젠체하면서도 ‘“그래도 현실이……”하며 한 발 빼는’ 모든 이들도 주류-A급과 같은 부류로 취급한다. (나의 어설픈 좌표도 이 부류 어딘가에서 표류하고 있는 듯하다.)


나는 김규항의 주장에 많은 부분 공명하지만, 어떤 주장에 대해서는 “글쎄”하며 고개를 갸우뚱 거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아이 교육에 대한 생각에는 거의 전적으로 동감한다. 경쟁, 일등/일류, 나만을 최고의 가치로 알게 만드는, 즉 변질을 가르치는 변절된 ‘주류-A급 교육’. 그 흐름에 휩쓸려 그 속으로 아이를 내몰면서 ‘아이의 미래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자위하는 부모. 그것에 안도와 위안을 얻으며 부모입네 젠체하는 ‘주류-A급 부모’에 대한 비판. (김규항은 ‘사람이 아니라 상품으로 키워지는 한국 어린이를 응원하는 어린이 교양지’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출신이자 대표일 만큼 아이들에 관심이 많은 교육자(?)이기도 하다.)


이제 나에게 아이 이야기를 쓰는 일은 내가 글 씁네 지신인입네 하다가 주둥이만 살아 움직이는 인간이 되지 않도록 하는 매우 강력한 장치가 되었다. 그런데 갈수록 아이에 대해 쓰는 것보다는 아이들의 말을 그대로 옮겨 적는 것에 흥미를 느낀다. 아이들과 대화하다 보면 뜻밖의 것들을 종종 얻게 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지난해 언젠가 나는 김건과 땅에 대해 대화하다가 가슴이 저렸다. 그는 말했다. “아빠, 그런데 왜 어른들은 땅을 자기 거라고 하는 거야?”

아이들, ‘아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어른’이라 불리는 사람들의 영원한 선생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아이만 같아라.’ 김규항은 주류-A급이 되느라 변질되고 변절하느니 차라리 아이의 순수한 눈에 머무는 B급이기를 자처한다 – 그래서 기꺼이 ‘B급’


혹자는 위에서 욕받이가 된 ‘주류-A급 좌파’, ‘주류-A급 교육’, ‘주류-A급 부모’ 등이 왜 변질된 것인가, 멸균상태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공중위생적으로 청정한 상태/지대이지 않는가라고 심히 의문을 제기하고 따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의문과 따짐에는 김규항을 대신해 나는 이렇게 답할 수 있다. “그렇게 믿는 것은 화학약품 처리로 이미 변질시킨 음식을 통조림 깡통 속에 넣고 변질되지 않은 순수 음식이라고 철석같이 믿는 꼴”이고, “바닷속에 살면서 도대체 짠물이 어딨냐고 찾는 꼴”이라고.



왼쪽 날개도 오른쪽 날개도 없이 나는 새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이영희 선생의 책 제목이기도 하고, 새가 좌우의 날개로 날듯 ‘온전한’ 좌파와 우파가 건강한 집단(국가)을 만든다는 신념의 표현이다. 그렇다. 제대로 된 좌와 우는 균형을 잡는 결정적 역할을 한다. 그런데 그건 ‘건강한’, ‘제대로 된’ 좌와 우를 전제로 한다.


그러나 현대 대한민국은 좌도 우도 없다. 그냥 둘이 뒤섞여 – 하나 되어 – 권력 나눠먹기 복마전(伏魔殿) 게임에 몰두하고 있을 뿐이다.


수구와 개혁은 적대적으로 보이지만 실은 가장 듬직한 동지이다. 개혁 세력이 자신을 진보로 포장할 수 있었던 건 대개 수구 세력 덕이었다. 그 놈들이 만날 빨갱이다 좌파다 해준 덕에 순진한 사람들은 개혁 세력을 진보 세력이라 믿게 된 것이다.


‘개혁 세력은 수구 세력의 도움으로 진보로 포장할 수 있었고 개혁이 진보를 자처하니 극우파인 수구는 아주 멀쩡한 보수로 행세할 수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악어와 악어새 관계이고, ‘좌’가 ‘좌’가 아니고 ‘우’를 ‘우’라 부를 수 없는 미궁 속이다. 이영희 선생의 한숨 섞인 개탄이 쟁쟁하다. (이쯤이면 노무현, 유시민이 왜 변질된 세력인지 알리는 쨉을 날린 셈이다.)


한국에서 그 시작은 제 군사 파시즘을 ‘한국식 민주주의’라 설파한 박정희다. “우리의 정치가 서구식 민주주의와는 다르지만 적어도 북한과 대치하는 한국 현실에선 최선의 민주주의다.” 지금 들으면 참으로 가소로운 소리지만 당시엔 많은 사람들이 그 소리에 빠져들었다. 박정희가 간 지 30여 년, 이른바 ‘민주화’가 시작된 지 20년, 개념 흐리기의 전통은 여전하다. ‘한국식 민주주의’는 ‘한국식 진보’로 바뀌었을 뿐이다. 요컨대 노무현이나 유시민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진보가 서구식 진보와는 다르지만 적어도 수구 세력과 대치하는 한국 현실에선 최선의 진보다.” (2007.03.23)


자기가 사는 현실을 무시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요지는 ‘그래도 현실이……’하며 한발 빼면서 옭아매는 기술에 걸려 ‘민주주의는 아주 오랫동안 유보되었고, 또 진보는 아주 오랫동안 유보되고 있는 중’이라는 것이다. (이제 노무현, 유시민이 왜 변질된 세력의 A급 요원들인지를 알리는 스트레이트를 날렸다.)



자본의 자본에 의한 자본을 위한

『B급좌파』 시리즈에서 김규항이 다룬 광범위한 소재들 중 핵심을 추리고 추려 한 가지만 뽑을 횡포적 권리를 누릴 수 있다면 나는 결국 ‘자본’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좌/우파가 좌/우파가 아닌 이유, 학교가 공장이 된 이유, 지구가 온난화와 쓰레기로 몸살을 앓는 이유, CEO가 대통령이 되는 이유…… 이 모든 이유의 배후에 자본이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이다.


노무현이 대통령 재임 시절, 정치권력도 이제는 자본권력에 좌지우지된다는, 정치가 자본시장을 지배하는 시대는 벌써 지났다는 의미로 한 말이 있다.


이미 권력은 자본에게 넘어갔습니다.


스스로 좌파 개혁 세력임을 자처한 노무현이 스스로 투항한 것이다. 이제 권력은 자본의 권력이요, 자본에 의한 권력이요, 자본을 위한 권력임을 자칭 좌파 대통령이 선언한 것이다. (나는 ‘바보 노무현’을 사랑한다고 이전의 글 ‘강물은 바다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강물처럼’에서 커밍아웃한 적 있다. 다시 한번 자본권력에 쓰러져간 ‘인간 노무현’의 명복을 두 손 모아 빈다.)


이 고통스러운 현실은 단지 이명박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그 괴물의 아가리에 들어앉아 있기 때문이다. 그 괴물의 아가리에 한국 사회를 몰아넣은 건 이명박이 아니다. 한국이 군사 파시즘에서 빠져나와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탑승하면서 시작된 일이며, 본격적으로는 김대중/노무현 정권 10년 동안 진행된 일이다. 이명박에겐 책임이 없고 김대중/노무현 책임이라는 게 아니라 김대중에서 노무현으로, 그리고 이명박으로 줄기차게 이어지고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김대중이라서, 노무현이라서 진보 좌파라는 생각은 착각이다. 이들은 진정으로 노동자 계급을 위한 진보적 정책을 제대로 펼친 적 없다. 오히려 세계화라는 구호를 선동하고 노동자를 탄압했으며, 신자유주의 정책을 쌓아 갔다. 왜? 진정한 게임판은 자본이 펼쳤고, 그들 또한 그 게임의 법칙에서 벗어나질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엔 진보가 아직 없다. 건국이래 한 번도 진보 좌파가 서질 못했다. 진보는 유보되고만 있다. 단지 권력 나눠먹기 게임판에서 흐려진 개념들이 ‘무늬만 진보’인 변질 진보를 주류-A급 진보로 만들어 준 것이다. (이제 노무현, 유시민이 변질된 세력의 A급임을 확정시키는 카운트 펀치를 날렸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윤석열이 광복절 특별사면 발표를 했다. 삼성전자 이재용, 롯데 신동빈, 동국제강 장세주, STX 강덕수 등 거물급 경제인은 사면했고 이명박 전 대통령과 김경수 전 경남도지사는 사면 대상에서 제외됐다. 정부는


“현재 범국가적 경제위기 극복이 절실한 상황인 점을 고려해, 적극적인 기술투자와 고용창출로 국가의 성장동력을 주도하는 주요 경제인들을 엄선하여 사면 대상에 포함함으로써 경제 분야의 국가경쟁력을 증진시키겠다”


고 휘황찬란한 수사를 토하고, 나도 토한다.


과연 대통령 특별 사면이라는 게 정당한가, 누구나 납득할 만한 형평성은 반영되었는가 따위는 이제 묻지도 않겠다. 오로지 경제, 경제, 경제 우선이다. 자본 제일주의를 목도하고 있다. 우파 정권이라 이렇다고? 자칭 개혁좌파정권이었다고 달랐을 리 없다. A급 우파 이명박, A급 좌파 김경수의 자업자득이다. 좌파 정권이고 우파 정권이고 가리지 않고 신자유주의를 적극 끌어들인 업보다.



차라리, 기꺼이, 건강한 B급

좌파입네, 부모입네, 지식인입네, 어른입네, 부자입네, 나입네 젠체하면서 주류-A급이 되길 바라는, 아니 못되어서 안달인 이 딱한 현실을 향해 김규항은 ‘욕’한다.


가난은 적게 소유함으로써 다른 사람의 몫을 늘리는 보다 정당한 삶이며, 적은 땅을 사용하고 적게 소비하고 적게 태움으로써 파괴되어가는 지구에 생명의 도리를 다하는 보다 품위 있는 삶이다. 품위마저 사들인 부자들은 세상에서 가난의 품위라는 것을 도려내기 위해 갖은 애를 쓴다. 바야흐로 품위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전쟁에서 반드시 이겨야 한다. 이 전쟁에서 질 때, 그래서 아이들이 가난하지만 정직하게 땀 흘리며 살아가는 제 아비 어미를 수치스러워하게 될 때 우리 삶도 끝장이기 때문이다.


어떤가? 변질되어 상해버린 주류-A급이 되느니 차라리, 기꺼이, 건강한 B급.


어줍잖은 말이지만 지식인이란 ‘내가 지향하는 바’와 ‘실제의 나’ 사이에 숙명적인 거리를 갖고 사는 ‘삶의 코미디언’이다. 지식인이 가질 수 있는 최선의 삶이란 그 숙명적인 거리를 어떻게든 줄이려 발악하는 것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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