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현대철학보다 더 현대적인 철학으로서, 어떤 윤리보다 더 현대적인 삶의 방법으로서 불교가 스스로를 불사르며 재탄생하는 사건을 고대한다.
이진경, 『불교를 철학하다』
수 백 권의 책을 한꺼번에 떠나보내야 했다. 눈에 밟히지 않은 책이 어디 한 권이라도 있었겠냐만, 책들의 표지를 손으로 살살 어루만져 주는 걸로 인사를 대신하고 떠나보냈다.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트럭에 실려 떠나가는 책들을.
두 권이 가방에 남았는데, 『불교를 철학하다』가 그중 한 권이다.
발칙한 작가
‘21세기 불교를 위한 하나의 초상’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의 저자 이진경은 철학자다.
‘전태일과 광주 시민들의 유령이 떠돌던 시절’, 혁명을 꿈꾸다가 여지없이(?) 감옥 생활을 하고 나서야 비로소 철든(?) 본명 박태호. 자본주의와 근대성에 대한 비판적 시각으로 여러 권의 책을 냈는데, 아마도 굶지 않게 만들어 준 베스트셀러는 『철학과 굴뚝청소부』일 것이다.
적어도 책 인세로만 따진다면, 작가를 굶지 않게 만들어 준 1인으로서 주장컨대, 그의 다른 책 『노마디즘』은 역작 중 역작이다.
이 책은 들뢰즈/가타리와의 우정을 기념하기 위한 책이다.
『노마디즘』 서문 첫 문장이다. 들뢰즈와 카타리는 현대철학에 있어 빠질 수 없는 철학자들이다. 그렇다. 이진경은 분명 철학자다!
철학자, 그것도 현대 철학자인 저자가 감히 불교를 논하다니, 오만불손하지 아니한가! 발칙하도다!!
언어의 한계는 세계의 한계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시대로 돌아가 보자. 너무 멀리 가려면 에너지가 더 드니, 가까이 조선말, 20세기가 막 시작되는 시점까지만 가보자.
주막에 앉아,
“저기 이모, 여기 와이파이가 안 터지네요. 와이파이 비번이 뭐죠?”
“뭐? 이모? 그건 그렇고, 와… 뭐요?”
“아, 제가 여기 초행길이라 앱으로 길 찾기를 하려구요”
“뭐? 뭐시라?”
“스마트폰…”
이어지는 절망.
같은 말을 쓰는 우리 조상님 들과의 대화가 도통 불통이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은 이때 등장한다. “언어의 한계는 세계의 한계다.”
차라리 이역만리라도 21세기 미국에서라면 상황은 훨씬 나을 것이다. 지구 반대편이지만 21세기 미국이라면 내 영어 실력으로 완벽한 문장을 구사하지 못하더라도 ‘와이파이’, ‘패스워드’, ‘앱’ 등등 사용하는 언어의 공통점이 있기에 눈치코치로 통하겠지만, 20세기 초반 조선에선 도무지 방법이 없다.
저자는 이 지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불교의 오랜 역사가 언제나 자신이 처한 연기적 조건 속에서 과거의 자신과 대결하며 스스로를 갱신해온 것임을 안다면, 이런 침윤과 혼합에 대해 ‘순수한 불교’를 준거로 비난하는 것처럼 불교와 거리가 먼 것은 없을 것이다. 소위 ‘21세기’라고 명명되는 시대, 그 연기적 조건에 따라 더욱더 멀리 그 침윤과 혼합의 힘을 밀고 나가는 사건들이야말로 지금의 불교에 긴요한 게 아닐까? 인터넷을 통해 지구상의 모든 곳이 연결되고, 기계와 인간이 섞이고 합체되며, 생명체가 복제되고 매매되는 시대, 이런 조건에 부합하는 또 하나의 불교가 탄생하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
저자가 불교학자나 스님은 아니지만(단언컨대 현대 철학자다), 적어도 꼬박꼬박 절에 다니면서 ‘사업 성공하게 해 주세요’, ‘시험에 합격하게 해 주세요’라고 구복(求福) 기도만을 불교로 아는 ‘보살님’들 보다 훨씬 불교를 더 잘 알고 불교 포교에 앞장 서고 있음을 확신한다. 의심 나면 읽어보시라. 이 책 『불교를 철학하다』를.
불교를 철학하는 저자는 불교를 ‘어떤 현대철학보다 더 현대적인 철학’, ‘어떤 윤리보다 더 현대적인 삶의 방법’으로 활용되기를 그 누구보다 바라 마지않는다. 아무리 더할 수 없이 높고 순수한 경지의 부처님 말씀이라도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한다면, 그래서 지금 나에게 다가오지 않는다면 ‘연기(緣起)의 불교’가 아닌 것이다.
성철스님의 불교
나는 절엘 종종 간다(성당도 종종 간다). 그리고 불교 공부를 조금, 아주 조금 했더랬다. 지금도 하고 있고, 영원히 하고 싶다.
경상남도 산청군에 위치한, ‘물은 물이요 산은 산이로다’로 유명한 성철스님의 생가와 절 그리고 기념관엘 간 적이 있다. 그곳에 성철스님의 말씀이 있는데, 정확한 워딩은 다 기억나지 않아 머릿속에 남아 있는 내용을 편집해 보면 내용은 이렇다. 무례를 용서하소서 스님 _()_
내가 수학, 과학, 역사, 철학 등 많은 학문을 두루 섭렵했지만 불교만큼 깊고 완전한 사상은 없었다. 그래서 부처님께 귀의했다. 만약 이보다 더 훌륭한 사상이나 철학이 있다면 바로 그것에 귀의할 것이다.
범부 중생의 귀에는 자칫 약간 거만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그랬다. 스님은 어릴 때, 출가 전부터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똑똑했고 또 열심히 공부했다 한다. 부처님의 제자가 된 후로는 더 용맹정진했기에 생전에도, 열반에 든 지금도 우리 불교를 이끌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불교가 도대체 무엇이길래 성철 스님이 완벽하다고 극찬한 것일까? 우선은 과문한 탓에, 더 근본 이유는 너무나 심오하고 방대한 탓에 내가 함부로 언급하는 것이야 말로 발칙하고, 오만이요 불손이다. 이진경의 21세기 식 안내를 통해 조금만 엿보기라도 하자.
연기, 공의 불교
부처(정확하게는 고타마 싯다르타)가 ‘발견(발명 아님!)’했다는 세상 진리의 요체요, 깨달음을 펼치기 위해 선택한 첫 번째 개념이 ‘연기’라고 저자는 말한다.
연기(緣起)란 무엇인가? 연(緣)하여 일어남(起)이다. 연한다는 것은, 어떤 조건에 기대어 있음이다. 따라서 연기란 어떤 조건에 연하여 일어남이고, 어떤 조건에 기대어 존재함이다. 반대로 그 조건이 없으면 존재하지 않음, 혹은 사라짐이다.
존재한다는 것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자체 독립적으로 있음은 없다. 있음이란 서로 다른 두 가지 이상의 무언가가 서로가 서로에게 부딪힌 사건(event)이다.
다른 것들과의 부딪히는 사건, 그 사건 자체만이 있음이요 존재다. 반대로 다른 것들과의 부딪히는 사건이 없음, 그것은 없는 것이요 사라짐이다. 결국 있다/없다, 존재/비존재는 연기의 사건인 것이다. 고정되고 독립적인 명사가 아니라 움직이는 순간순간들이고 의존적이며 변화인 동사다. 퇴장했던 비트겐슈타인이 다시 등장한다. "세계는 사물의 총체가 아니라 사건의 총체다."
바이올린은 바이올린이다. 특정한 조건 속에서만 그것은 악기가 된다.
이진경은 바이올린을 끈에 묶어 아스팔트 위를 질질 끌고 가는 백남준의 퍼포먼스를 예시하면서 연기를 말한다.
바이올린은 연주자의 어깨에 올려져, 즉 다른 것과의 부딪힘이라는 조건이 성립되어 음악적 소리를 낼 때 비로소 바이올린이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질질 끌고 다니는 퍼포먼스 소품 또는 장난감 또는 불쏘시개.
인간이든 사물이든, 어떤 것도 불변의 본성은 없다. 그렇기에 조건에 따라 달라지는 수많은 ‘본성’이 있는 것이다. 본성 아닌 본성들이.
그렇다면 바이올린이나 흑인의 본성은 그것의 내부에 있는 게 아니라, ‘외부’에 있다고 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연기적 사유는 어떤 것의 본성을 그 외부에 의해 포착하는 ‘외부성의 사유’다.
바이올린의 예에서 보았듯 흑인도 누구와 어떻게 만나느냐에 따라 노예도 주인도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흑인의 본성은 외부와의 부딪힘에 따라 변하는 것이지 내부에 변치 않는 자성으로 있는 것이 아니다.
바이올린에게는 불변의 본성 같은 것은 없다. ‘자성(自性)’이 없다는 말이 뜻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연기적 사유가 자성 없음을 설하는 ‘공(空)’이란 개념으로 이어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불변, 독립적으로 가진 본성을 자성이라고 하는데, 연기로 인해 불교는 불교라고 쓰고 ‘본무자성(本無自性, 그 무엇/누구에게도 원래의 자성은 없다)’으로 읽어도 되는 것이다 - 이게 맑스(Karl Marx)의 '역사 유물론'이니, 불교와 맑스, 아! 이를 어쩔.
또한 연기는 곧 대승불교의 근간이 되는 ‘공 사상’으로 발전하게 된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 있는 것은 곧 없는 것이요, 없는 것은 곧 있는 것이다.
무상, 무지의 불교
그래서 불교의 가르침을 꼽을 때 가장 먼저 드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제행무상(諸行無常)이다. 제행무상이 바로 본체로, 그것 이외의 본체는 따로 없다는 것이다. 세상의 도를 깨친다는 것은 바로 이 무상을 통찰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무상함을 아는 것뿐 아니라, 무상 속에서 모든 것을 보고, 자신이 만나는 모든 것을 무상함 속에서 대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무상(無常)은 우리가 흔히 ‘항상 건강하십시오’라고 말할 때 그 항상의 반대 의미라고 이해하면 된다. 언제나 변함없음이 항상이라면, 불교는 그런 건 없다고 단칼에 선언해 버리는 것이다. 일체는 항상 하지 않다. 항상이란 없다. 일체 모든 것은 무상이다.
상(常)은 항구, 영원, 일정을 뜻하는데, 불변의 동일성을 유지하는 것이 항상이다. 반면 무상은 그런 동일성은 없고 있다면 ‘항상’ 변화만, ‘항상’ 차이만 있다는 것이다.
동일성은 이 차이들을 무시하고 비슷해 보이는 걸 하나로 묶을 때 오는 것이다. 비슷한 형상의 얼굴이 반복하여 나타날 때, 비슷한 나뭇잎이 반복하여 감지될 때 우리는 그것이 같다고 간주하고, 그것에 하나의 이름을 부여한다. 그렇게 이름이 부여되면, 그 이름으로 불리는 것은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거기에 따라붙는다. ‘명언종자’라고 부르는 것이 동일성의 ‘씨(종자)’, 지속되는 동일성이란 환상의 새로운 씨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무상한 것을 구별하며, 동일한 것을 포착하려는 성향의 작용이다.
우리가 ‘은행잎’이니 ‘단풍잎’이니 하고 대충 비슷하게 보이는 것을 뭉뚱그려 하나로 묶어 부르지만 – 언어화 하지만, 사실 ‘세상에 똑같은 두 장의 나뭇잎은 없다.’ 이렇게 뭉뚱그려 대충 같다고 간주함으로써 확보되는 삶의 편의성이 동일성을 유지하고 싶은 이유다.
동일성을 유지한다는 것은 실제에 대한 환상과 왜곡과 굴절이 필연적이다. 실상은 다른 것, 차이만 존재하는 상태이자 사건(event) 일뿐인데, 변화하는 사건을 멈춰 세운 뒤, 명명하고 이후 비슷한 것들은 같음으로 간주하는 행위 – 이를 개념화한다고 표현한다 – 는 벌써 왜곡이자 굴절이다. 이런 왜곡과 굴절을 바탕으로 행해지는 이후의 판단이나 추론은 더 말해 무엇하랴.
무지가 실상을 보지 못하는 것이라면, 이는 근본적으로 동일성 때문에 무상의 실상을 볼 수 없는 이런 조건에서 기인한다. 근본적 층위에서 발생하는 이 무지란, 새끼줄을 뱀으로 오인하는 것뿐만 아니라, 뱀을 뱀이라고 보는 데에 포함된 오인이다. 눈앞의 대상이 전에 본 뱀과 ‘동일한’ 대상이라고 보는 데서 오는 오인이다. 따라서 그것은 눈을 가려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눈을 사용하기에 보이지 않는 것이고, 귀가 막혀 들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귀로 분별하기에 들리지 않는 것이다.
세상은 ‘고(苦)’인데 고통의 시작은 ‘무명(無明)’, 즉 밝음이 없어 알지 못하는 무지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 그런데 무명에 대한 저자의 해설이 무릎 탁 치게 만든다.
뱀을 뱀이라고 보는, 무상의 실상을 바로 보지 못하는 무지는 어쩔 도리 없는 ‘근본적 무지’이자 생존해 나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필연적 오류’라는 것이다. 그리고 덧붙인다.
그렇기에 이 무지는 자신이 세상의 실상을 보지 못하고 있음을 모른다. 반대로 세상을 잘 보고 있다는, 실상을 잘 알고 있다는 오인을 동반하는 것이란 점에서 이중의 무지다.
자신이 무지한 줄 알면 무지를 벗어나려 애쓰겠지만, 모르기에, 아니 세상을 잘 알고 있다고 믿기에 벗어날 생각조차 어려운 것이다.
나의 불교
전라남도 순천에 있는 송광사를 찾았다. 송광사에서 길을 따라 오르다 보면 법정 스님이 머물던 암자, 불일암에 이른다.
길이 너무 좋았다. 열반에 드신 법정 스님의 자취가 느껴지는 듯했다. 공연히 불심 솟는다. 내친김에 스님께 여쭈었다.
“나는 누구입니까?”
“질문 자체가 틀렸어. 어리석은 놈!”
스님, 큰 스님!
연기, 공, 무상, 무지가 항상 하겠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 그렇게 되면 불교가 아닌 게 된다. 연기도 공도 무상과 무지도 불교를 설명하기 위한 방편일 뿐이다. 어떤 방편도 연기, 공, 무상이다.
내가 이해한 불교는 세상 만물 그 자체다. 불교는 천변만화(千變萬化)하는 만물 그 자체다. 그러니 고타마 싯다르타를 절대자, 교주로 모시는 천박 무례함을 드러내지 말자. 싯다르타는 분명 삼배받아 마땅한 부처지만, 부처의 다른 이름은 셀 수 없이 많다. 세상 만물 전부가 부처다.
이런 까닭에, 내가 당신에게 절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두 손 모아 합장!
덧붙이는 글
하나, 그때 두 권의 책이 가방에 남아 아직도 나와 함께 생활하고 있는데, 그럼 나머지 한 권은? 아마도 그 한 권에 대한 글이 이 글 ‘동사로 살어리랏다’ 시리즈의 휘날레가 될 것이다. 기대하시라!
둘, ‘만약 무인도에 갇혀 살게 되었고, 단 한 권의 책만 가지고 갈 수 있다면 어떤 책을 가지고 갈 것인가?’라는 문답을 많이 하곤 하는데, ‘나는 절대 고를 수 없으니, 다 못 가져가게 할 것 같으면 차라리 내 목을 시원하게 치시오’라고 멋있게 말하고 싶지만, 무인도에 가져 가고싶은 단 한 권의 책, 그 책에 대한 글이 이 글 ‘동사로 살어리랏다’ 시리즈의 휘날레가 될 것이다. 기대하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