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다.

『에티카, 자유와 긍정의 철학』의 무등에 올라타서

by 동사로 살어리랏다

스피노자를 알게 된 시기와 알지 못하던 시기로 삶이 구별될 수 있다는 것, 둘 사이에는 삶의 본성에 있어 극도의 차이가 있다는 것, 니체의 말처럼 준족의 아킬레스도 건널 수 없는 심연이 두 시기 사이에 가로놓여 있다는 것.

이수영, 『에티카, 자유와 긍정의 철학』




그렇다. 『에티카, 자유와 긍정의 철학』의 ‘책머리에’에서 이수영이 개인적으로 겪었던 놀라운 사실에 나도 전적으로 동감한다. 나 또한 스피노자(Baruch Spinoza)를 알게 된 이후와 이전의 세계는 놀랍도록 정반대로 전환되었다. 그 세계는 분명 이전에도 있었고, 이후에도 그대로였건만.



망상, 망상, 망상

이수영은 스피노자야말로 ‘우리 삶을 저주하게 만드는 망상과 환상들을 깨트려 우리 삶과 세계를 긍정으로 이끄는 진정 망치의 철학자’ 임을 강조한다.


신을 사랑할 수 있다거나 신이 인간을 미워할 수 있다는 망상, 의지가 자유롭다는 망상, 인간의 본성이 원래 타락한 것이라는 망상, 신이 이 세계를 창조한 목적이 있다는 망상, 신이 이 세계를 바꿀 수 있다는 망상, 신체 없이 이성적일 수 있다는 망상, 정신이 신체를 지배한다는 망상, 필연과 자유가 대립된다는 망상, 고독 속에 자유가 있다는 망상, 믿음이 세계를 바꿀 수 있다는 망상, 국가가 최종 목적이라는 망상, 신적인 인식에 도달할 수 없다는 망상.


신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게 망상이라고? 신이 우리를 지켜주거나 벌줄 것이라는 것이 망상이라고? 내가 내 의지대로 자유롭게 선택하고 행동하는 것이 망상이라고? 인간 따위가 신의 인식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 건방진 망상이라고?


어떤가? 망상으로 보이는가? 망상으로 보이지 않는다면, 스피노자는 아직도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맹목적 사랑에 빠져 있다는 진단을 내린다. 맹목적 사랑이 우리 삶을 저주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예속을 자신의 영예로 아는 무지몽매

스피노자는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고, 그 사회의 엘리트 코스 교육을 받았으나 결코 기득권을 이어받거나 안주하지 않는다. 오히려 공동체로부터 위험천만한 인물로 낙인찍히고 파문당하고 추방된다.


율법책에 쓰여 있는 모든 징벌로 그를 저주한다. 그는 낮에 저주받을 것이며, 밤에 저주받을 것이다. 그가 누울 때 저주받을 것이며, 일어날 때 저주받을 것이다.


스피노자가 공동체로부터 파문을 당하면서 받은 저주의 서(書)의 일부분이다. 저보다 더 잔인한 저주가 있을까. 저토록 잔인한 저주와 파문이라니. 도대체 어떤 망치를 들었기에?


독재와 군주를 원했던 사람들이 당시 공화주의자들을 갈가리 찢어 살해는 모습을 목격한 스피노자는 대중들의 무지몽매를 한탄하며, ‘야만의 극치’를 들추고 깨트리는 망치를 들기 시작한다.


아, 왜 이렇게 대중들은 무지몽매하고, 예속이 자신의 영예나 된다는 듯이 그 예속을 위해 비인간적인 폭력도 마다하지 않는 것인가?


스피노자는 대중들의 무지, 증오, 원한의 뿌리를 들추고, 자신을 스스로 예속의 노예로 만드는 사람들과 사회를 망치로 깨트렸다. 그 결과물들이 『신학정치론』이고 『에티카』다. 당시 유대교 원로들과 랍비들의 질서를 망상이라고 반기 들었던 것이다. 기존 질서가 저 반동분자를 어찌 가만 둘 수 있었겠는가. 스피노자는 파문 ‘당하’고 추방 ‘당했’다. 그러나 그건 그들의 생각이고, 스피노자는 ‘저주의 공동체’로부터 스스로를 단절시킨 것이었다.


사실 내가 제일 처음 스피노자를 만나게 된 것도 저 유명한 스피노자의 말로부터다. 과거 한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질 않았다 – ‘왜 사람들은 저 사람과 저 권력에게 투표하지? 저들은 나의 존엄성과 자유를 보장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고분고분 말 잘 듣는 노예로 만들겠다는 거잖아? 그런데 왜 사람들은 저 사람과 저 권력에 자신의 목을 내놓지 못해, 예속되지 못해 안달인 거야?’ 이해 불가를 넘어 분하기까지 했다.


다행히도, 감사하게도 나는 스피노자를 만난 이후부터, 그들의 저러한 행동이 무엇 때문인지 알아차리게 되었고 분함도 다스릴 수 있게 되었지만, 애석하게도 나의 사회는 망상과 무지몽매로 인한 ‘예속 영예’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주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나이다.



우리들 없이는 신은 자신을 표현할 수도, 존재할 수도 없다

『에티카』를 읽는다는 것은 분명 어려운 일이다. 새롭고 난해한 개념들도 개념들이지만, 서술의 방식이 여간 낯설지 않기 때문이다.


수학적이고 기하학적인 증명의 방식이라는 서술 체계상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읽어나갔을 때 스피노자의 체계는 삶에 대한 놀랄만한 아름다움과 긍정으로 가득한 개념들의 발명이었다.


난해함을 뚫고 나가면 증오, 원한, 복수, 예속이 아니라 ‘삶에 대한 자유와 긍정’이 나를 반긴다. 분명 그렇다. 존재의 완전성과 긍정성!


나 같이 철학 비전공자가 난해한 스피노자의 철학을 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증오와 예속의 노예적 삶에서 벗어난 자유와 긍정의 삶’에 초점을 맞춘다면, ‘신즉자연(신이 곧 자연이고 자연이 곧 신) – 범신론’과 ‘목적론적 세계관’에 사로잡힌 ‘1종 인식’을 핵심적으로 포착해야 한다.


이처럼 스피노자는 자연 혹은 우주를 변화하는 존재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우주 전체를 포괄하고 있으며, 그것의 변화를 일으키는 원인이 바로 실체입니다. 이 실체는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기에, 다른 것을 원인으로 갖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이 바로 자기 자신의 원인입니다. 이래서 자기 원인이라고 하지요. 이걸 스피노자는 ‘신’이라고 부릅니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실체, 신은 바로 자연(우주) 밖에서 그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연 안에 있는, 모든 변화의 원인을 가리킵니다. 이건 자연 자체를 뜻하지요. 이런 뜻에서 ‘자연은 실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을 고려해 볼 때, 스피노자의 ‘신’이란 개념은 종교적인 절대자가 아니라 바로 자연 안에 있는, 변화를 만들어내는 요인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걸 흔히 ‘범신론’이라고 합니다.


『철학과 굴뚝청소부』에서 이진경이 설명하는 스피노자의 범신론이다. 스피노자는 자기 원인, 즉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 완전성을 갖춘 것을 ‘실체’라 정의하며, 그런 실체를 ‘신’이라고 부른다. 완전성을 갖춘 실체=신이기에 어떤 제한도, 모순도 있을 수 없다. 부정이 있을 수 없다. 있다면 신성모독이다. 그러니 자기 밖에서 운동과 변화의 원인을 찾을 수 없다. 변화의 원인을 스스로 가지는 자연 그 자체가 이제 실체가 된다. 실체=신=자연.


다른 한편 자연은 변화하는 각각의 개체들로 이루어집니다. 예컨대 태어나고 늙어가는 인간에서 흐르는 물과 변화하는 계절에 이르기까지 극히 다양하고 가변적인 것들의 집합이 바로 자연이지요. 이처럼 변화하는 개체들 각각을 일러 ‘양태’라고 한 셈인데, 이런 뜻에서 ‘자연은 양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내심을 가지고 이진경의 설명을 조금만 더 따라가 보자. 실체(=신=자연)는 ‘변용’을 특징으로 가지고, 그 변용된 각각을 ‘양태’라 하는데 이 양태들이 실체를 이룬다. 인간, 물, 봄여름가을겨울 등등. 따라서 실체는 양태로 존재한다.


자 이제 위 설명들을 나와 연관해서 등호로 표현해 보자. 마술 같은 일이 벌어진다.


‘실체=완전=긍정=신=자연=양태=만물=나’


우리들 없이는 신은 자신을 표현할 수도, 존재할 수도 없다. 이것이 범신론이고, 자유고 긍정이다.


조금만 힘내서 우리의 인식에 대한 스피노자의 철학을 살펴보자. 매우 중요하다.


부분적이고 부적합한 인식, 그것을 스피노자는 “1종 인식 knowledge of the first kind”이라고 부른다. 이것 말고 이성적인 인식이자 공통 개념에 해당하는 “2종 인식”, 그리고 우리가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신적인 직관에 해당하는 “3종 인식”이 있다. 자연적인 상태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은 기본적으로 1종 인식의 상태에 놓여 있는데, 이는 크게 무작위적인 경험에 의한 인식과 기호 sign에 의한 인식(2부, 정리 40, 주석 2)으로 나뉜다.


이수영이 해설한 스피노자의 저 말은 즉 이런 것이다. 내가 아는 것은 내 신체가 아는 것이지 결코 그 자체를 아는 것이 아니다. 태양을 보는 ‘눈’이 태양을 인식하는 것이지 태양 그 자체를 아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그렇게 아는 것은 ‘불완전한 인식/관념’이다. 단편적이고 표피적인 인식, 이를 ‘1종 인식’이라 부른다. 이 사실을 모른 채, 그 자체를 안다고 생각할 때 오류가 발생하는 것이다.


불완전한 인식을 완전하다고 착각하고 행동한 결과는 오류다. 그렇게 ‘1종 인식’에 머물고 ‘1종 인식’에 의해 행해진 행위가 바로 근시안적 이기심이요 증오, 원한, 복수, 예속 – 오류인 것이다. 수동적이고 필연적이기까지 한, 정념에 예속된 삶. 그러니 이것 말고 적어도 이성적 인식인 ‘2종 인식’은 깨쳐야 하며, 나아가 신적 인식인 ‘3종 인식’에 이를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 인간은 신의 한 양태이기 때문에, 즉 우리 인간 없이는 신은 자신을 표현할 수도 존재할 수도 없기 때문에 이와 같은 2종, 3종 인식을 우리 인간은 알 수 있고, 도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스피노자의 자유와 긍정이다.



나의 이름은 자유와 긍정

철학 전공자가 아닌 경우에야 『에티카』를 처음 만나게 되면 금산 철벽이다. 할 수 없다. 돌아가야 한다.


모든 고귀한 것은 힘들 뿐만 아니라 드물기까지 하다.


스피노자가 우리에게 미리 해둔 말이다. 포기 말고 끝까지 자신에게 와보라는 듯.


다행히도 『에티카, 자유와 긍정의 철학』은 돌아가는 길을 친절히 안내해 준다. 『에티카를 읽는다』(스티븐 내들러), 『고요한 폭풍, 스피노자』(손기태), 『스피노자』(야론 베이커스) 등 그 밖에도 스피노자 초행길의 훌륭한 안내자들이 있다. 『스피노자와 붓다』(성회경)도 정독하면 더 좋다. 이들을 통해 스피노자를 간접적으로, 그리고는 마침내 직접 만나게 되면 나의 이름은 자유와 긍정으로 바뀐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오 위대한 작품, 『그리스인 조르바』를 쓴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Nikos Kazantzakis)의 묘비명이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주인공 ‘조르바’는 실제 인물이다. 카잔차키스가 만난 실제 인물을 모델로 『그리스인 조르바』를 쓴 것이다. 묘비명은 조르바를 존경한 카잔차키스의 찬사 일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카잔차키스의 저 경지가 부럽다.


나는 오륙도 앞바다엘 종종 간다. 오륙도 앞바다 언덕에서 영화 「그래비티」(Alfonso Cuaron 감독, 2013)의 ‘사운드트랙 16 – 그래비티(메인 테마)’를 듣고 있노라면 온 세상 기운이 내 몸속으로 몰려든다. 조르바가 카잔차키스가 그리고 스피노자가 내가 되어 춤을 춘다. 자유와 긍정의 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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