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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을 살어리랏다

『순간의 꽃』의 무등에 올라타서

by 동사로 살어리랏다

순간에 대해서 좀 언급한다. 나도 누구도 매순간의 엄연한 기운과 함께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존재 자체가 변화 미분(微分)들의 순간을 이어가는 것 아닌가.

고은, 『순간의 꽃』




『순간의 꽃』은 선시(禪詩)다. 사량 분별 않은 여여(如如)의 시다.


『순간의 꽃』은 순간의 시다. 지나간 과거와 다가올 미래 사이의 지극히 짧은 사이를 순간이라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의 연속일 뿐 뭐가 남는가? 그러므로 『순간의 꽃』은 영원의 시다.




오늘도 누구의 이야기로 하루를 보냈다


돌아오는 길

나무들이 나를 보고 있다


하루도 빠짐없이, 오늘'도' 남 이야기, 무슨무슨 이유를 대면서 날 새우고 나를 세웠다. 우쭐한 하루였다.


헤어지고 혼자다. 아니다, 말없는 나무 말없이 서 있다. 말없는 말이 꽂힌다. “입 다물 일이다.”




봄비 촉촉 내리는 날

누가 오시나 한두 번 내다보았네


‘신 벗어 손에 쥐고 / 버선 벗어 품에 품고 / 곰뷔님뷔 님뷔곰뷔 / 천방지방 지방천방 / 한 번도 쉬지 않고 / 허위허위 올라가니 / 버선 벗은 발일랑은 / 쓰리지 아니한데 / 님 그리는 온 가슴만 / 산득 산득하더라’ – 송골매, 「하늘나라 우리님」




누우면 끝장이다

앓는 짐승이

필사적으로

서 있는 하루


오늘도 이 세상의 그런 하루였단다 숙아


로변 인도 포장마차 하던 노파, 대낮에, 만취한 40대 여성 운전자의 돌진에, 즉사했다.고 저녁 뉴스에 나오고 있다.




노를 젓다가

노를 놓쳐버렸다


비로소 넓은 물을 돌아다보았다


한때 임전무퇴의 각오로 진격의 노를 저었다. 이기지 않고는 돌아가지 않으리라는 각오로, 아니 돌아갈 곳 없는 줄 알고 앞으로 앞으로만 저었다. 앉아서도 누워서도 서서도 저었다. 놓지 않았다, 저었다. 놓을 수가 없었다, 저었다.


제자리 빙빙 돌았더라.




4월 30일

저 서운산 연둣빛 좀 보아라


이런 날

무슨 사랑이겠는가

무슨 미움이겠는가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말문 턱 막히고 만다.




옷깃 여며라

광주 이천 불구덩이 가마 속

그릇 하나 익어간다


순간,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지금도 그렇다. 왜인지 모르겠다. 아니 모르고 싶다.


뭇 생명들에 대한 경이로움? 세상을 조망하지 못하는 내 좁은 안목에 대한 한탄? 이래도 좋다, 저래도 좋다. 차라리 모르고 싶다.




어린 토끼 주둥이 봐

개꼬리 봐

이런 세상에 내가 살고 있다니


신비로움과 설렘으로 가득 찬 세상이다. 만물이 모두 다 반짝 반짝인다. "여보세요, 저를 좀 봐요"


이런 것들과 함께 지낼 수 있다니




무슨 질풍노도 무슨 잔치를 꿈꾸는가

걸려 있는 징


과거 신명을 이끌었던 징 하나 벽에 걸려 있다. 징은 꿈꾼다. 지난날 화려했던, 훈장 단 사진을 벽에 걸어 두고 꿈꾸는 노병처럼.




어쩌란 말이냐

복사꽃잎

빈집에 하루 내내 날아든다


화창 봄날 대청마루에 앉아 있는 내 얼굴 위로 봄 햇살 봄 바람 봄 복사꽃잎 마구마구 떨어져 나린다. 봄 봄 봄 봄, 하릴없어 맞으니 즐거웁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


서둘러 올라야 한다. 저 정상 꼭대기에. 아래도 뒤도 돌아보면 끝장이다. 앞만 보고 걷는다. 정상만 보고 걷다가 조바심에 급기야 뛰기 시작한다. 휴! 다행이다. 목표 달성! 성공 인생!


원통하고 슬프다.




이런 날이 있었다

길 물어볼 사람 없어서

소나무 가지 하나

길게 뻗어나간 쪽으로 갔다


찾던 길이었다


아 이제 끝이다, 이제 모든 걸 포기하고 뛰어내리자. 절망.


시가 내게로 왔다. 써서 걸어 두었다. 길이었다.




곰곰이 생각건대

매순간 나는 묻혀버렸다

그래서 나는

수많은 무덤이다


그런 것을 여기 나 있다고 뻐겨댔으니


산전수전공중전육박전을 겪고 삶이 동사라는 걸 알았다. 내가 내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여전히 허우적거린다. 그래서 쓰기로 했다.




급한 물에 떠내려가다가

닿은 곳에서

싹 틔우는 땅버들씨앗


이렇게 시작해보거라


신세를 한탄하고 싶은가? 꽃잎에서 떨어져 나와 이리저리 흩날린 후 겨우 내려앉았건만 다시 만난 폭우에 정신없이 떠내려가다가 벼랑 끝에 닿은 곳에 싹 틔우는 땅버들씨앗을 보고도?


이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위로의 말, 땅버들씨앗처럼 이렇게 시작해보거라.




함박눈이 내립니다

함박눈이 내립니다 모두 무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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