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끝내 그를 위한 변명을 쓰기로 작정한 것은 몸을 사리지 않고 역사에 헌신한 그의 삶에서 진한 진정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리는 특권마저 불의가 정의를 대신해 가로챘던 불운의 시대에 태어나, 현실과의 싸움에서도 역사의 법정에서도 모두 패한 사람이 있다면, 후세에 누가 그의 진실을 알아줄 것인가.
조유식, 『정도전을 위한 변명』
강물처럼
‘강물은 바다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강물처럼.’은 서명을 할 때 이름 석자와 함께 덧붙인, 영원히 남을 노무현(盧武鉉, 1946~2009)의 시그니처다.
‘강물은 바다를 포기하지 않습니다’로 끝났다면 그냥 그렇고 그런 ‘비 엠비셔스’, 흔하디 흔한 훈계조로 머물 수 있었던 말이다. 하지만 끝에 ‘강물처럼’이라는 이 짧은 한 구절로 인해 ‘비 엠비셔스’와는 차원이 다른 명언이 되어 버린다.
‘강물처럼’이라는 마지막 추임새는 ‘좌절하지 말라’, ‘포기하지 말라’라는 밑도 끝도 없는 희망 타령을 단박에 ‘좌절하고 싶어도 좌절할 수가 없다’, ‘포기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로 만들어 버린다 – 좌절과 포기는 자연의 일이 아니다. 그러니 너의 일도 아니다.
좌절, 포기의 비자연성을 살아간 또 다른 인물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의 이야기 『정도전을 위한 변명』은 묘하게 노무현을 위한 변명과 오버랩된다.
정도전 VS 노무현
시대
정도전의 시대는 이러했다.
100년에 걸친 무신집권기(1170~1270)의 정국 혼란과 40여 년에 걸친 대몽항전(1231~1273) 패배에 이어, 또다시 80여 년에 걸친 원의 내정간섭기를 맞이함으로써 고려의 국위는 실추될 대로 실추되고 민생은 도탄에 빠졌다.
35년에 걸친 일제강점기(1910~1945)와 3여 년에 걸친 한국전쟁(1950~1953(정확히는 아직 진행 중))에 이어, 쿠데타로 시작된 30여 년간의 무신집권기(1961~1993)를 맞이함으로써 대한민국은 혼란과 격변의 연속이었다.
노무현의 시대는 저러했다.
흙수저
정도전은 승려와 노비의 핏줄이다. 아버지 정운경은 시골마을 향리를 지낸 집안 출신이고 그 자신은 과거에 합격도 한 인물이지만, 외가 쪽이 그랬다. 아무튼 정도전은 천민의 피를 받아 태어났고, 이 때문에 상당한 고난을 겪는다.
봉건시대 개혁 정치가에게 핏줄 시비는 오늘날 개혁 정치가의 색깔 시비만큼이나 떨쳐버리고 싶은 약한 고리였을 것이다.
노무현은 미군정 시절, 가난한 시골마을에서 3남 1녀의 막내로 태어난 ‘촌놈’이었다. 지지리도 가난한 경제적 어려움으로 초중등 과정도 어렵사리 마쳤지만, 취직을 위해 대학 진학을 하지 못하고 실업 고등학교로 진학하는 등 전형적인 흙수저 태생이다.
수재(秀才)
정도전은 ‘이색 학당’ – 고려 말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이색(李穡)은 13세 성균관 시험 합격, 26세에는 원나라 국가시험을 1등으로 합격한 흔치 않은 국제적 천재였고, 그가 유학과 벼슬살이를 마치고 고려로 귀국해 세운 당대 최고의 명문 엘리트 사학 – 출신의 ‘엄친아’였다.
정도전을 비롯해 정몽주, 이숭인, 권근, 이존오, 김구용, 김제안, 박의중, 윤소종 등 뒷날에 여말선초의 중앙 정계를 주름잡은 개혁파 정치가들의 대부분 이색 문하였으니, ‘이색 학당’은 개혁파의 정치학교 역할을 한 셈이다.
초중등 과정에서도 학업과 리더십 등에서 남달랐던 노무현은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다가 30세 나이에 당시 대한민국 건국이래 유일한 고졸 출신 사법고시 합격의 영광이라는 기염을 토하는 수재였다.
정면 돌파
두 번째 대결은 몇 달 뒤 국교가 재개되고 원의 사신이 오자, 친원파 집권 세력이 자타가 공인하는 반원파 정도전에게 사신을 영접하라고 명함으로써 촉발되었다. 사신을 영접하면 명분을 꺾고 스스로 주저앉는 꼴이 되고, 영접하지 않으면 임금의 명을 어긴 죄로 처벌받을 처지였으니 정도전으로서는 진퇴양난이었다. 그러나 정도전은 여기서 앞으로 그의 상징이 되는 정면 돌파의 길을 주저 없이 택한다.
한때 개혁군주이기도 했던 공양왕이 죽자, 다시 득세한 친원파 세력에게 반원, 개혁의 상징 정도전은 눈엣가시였다. 얽히고설키고 자기 이익 중심의 배반이 판을 치는 복마전에서 결국 정도전은 유배를 당한다. 당했다지만 사실은 스스로 택한 것이다. 10여 년의 야인 생활을.
수구세력이 득세하는 시기에 그들과 타협하지 않고 원칙과 명분대로 행동했던 정도전의 처신은 탁류에 발끝조차 담그지 않겠다는 의지를 공개적으로 천명한 것이다. 이로써 정도전은 훗날 탁류가 청류로 바뀔 때 누구보다도 당당하고 깨끗하게 새로운 흐름의 주역으로 나설 수 있는 도덕성과 정통성을 가질 수 있었다.
스스로 야인의 길을 택한 정면 돌파는 결국 걸출한 거인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노무현은 1988년 부산에서 첫 국회의원(13대)에 당선된다. 그러나 1992년 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된 후 줄줄이 낙선하게 된다. 1995년 민주당 부산시장 선거 낙선, 1996년 15대 국회의원 선거 낙선. 그리고는 마침내 1998년 당시 이명박 국회의원이 금품 선거한 짓이 발각되어 의원직을 상실하게 되자 치러진 보궐선거에서 당선된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2000년 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다시 사지(死地)나 다름없는 부산으로 돌아가 ‘당당히’ 낙선. 부산에서만 세 번째 낙선.
이 아픔을 잊는 데는 시간이 약이겠지요. 또 털고 일어나야 지요. 농부가 밭을 탓할 수는 없겠지요.
3김 청산과 지역정서는 논리로 설득해 해결될 일이 아니고, 제3당으로는 지역당을 타파할 수 없다는 경험적 인식을 얻었다.
위는 부산에서만 세 번째 낙선 후 자신의 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렸던 글이고, 아래는 지역주의 극복의 어려움을 자서전 『운명이다』에서 밝힌 글이다.
지역주의 역풍이 불지 않는, 당선 가능성이 보장된 곳을 스스로 걷어차고, 홀로 지역주의에 맞서 극복하고자 험지로 나선 결과이다. 다시 말해 노무현은 스스로 거친 들판의 길을 걸으며 정면 돌파했던 것이다. 결국 거인의 길이었다.
민본(民本)
정도전은 국가 권력과 백성의 관계를 일종의 ‘사회 계약’으로 보면서 구성원(통치자와 백성) 간의 평등과 균형이 유지되는 국가를 염원한 민주주의자였다.
토지제도가 파괴된 후부터는 호족이 겸병하여 부자는 땅이 더욱 불어나고 가난한 자는 송곳 꽂을 땅도 없다. 가난한 자는 부자의 토지를 빌려 경작하고 일 년 내내 고생해도 먹을 것도 부족할 지경인데, 부자는 편안히 앉아 소작인을 부려 그 수입의 태반을 먹는다.
정도전이 저술, 편찬한 『조선경국전』의 일부다. 『조선경국전』은 조선 건국 직후인 1394년(태조 3년)에 지어진 국가 운영 지침서다. ‘가난한 자는 송곳 꽂을 땅도 없다’는 사자후(獅子吼)는 그가 얼마나 민을 위하고 평등을 염원했는지 지금도 쟁쟁하게 들린다.
사회 계약설에 기반한, 서양 근대 국가 체계의 사상적 시발점이라고 일컫는 근대 철학자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의 『리바이어던』이 1651년에 나왔으니, 정도전은 무려 250여 년이나 앞선 선각자였다.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회는 더불어 사는 사람 모두가 먹는 것 입는 것 이런 걱정 좀 안 하고 더럽고 아니꼬운 꼬라지 좀 안 보고 그래서 하루하루가 좀 신명 나게 이어지는 그런 세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이런 세상이 좀 지나친 욕심이라면 적어도 살기가 힘이 들어서 아니면 분하고 서러워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그런 일은 좀 없는 세상 이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월남전에 참전해서 돈 벌어 경제가 발전했다는 논리를 펴는 기득권자들을 향해) 저는 이렇게 묻겠습니다. 그런 발상을 가진 사람들에게 파이를 크게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니네들 자식 데려다가 죽이란 말이야! 춥고 배고프고 힘없는 노동자들 말고, 바로 당신들 자식 데려다가 현장에서 죽이면서 이 나라 경제를 발전시킵시다!
1988년 대정부질의에 나선 노무현 국회의원의 연설이다. 이 밖에도 그는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 등과 같은 ‘민 우선’ 철학을 강조했고, 실제로 행동했다. 반칙과 특권 없는 민의 세상.
패착
고려말, 정몽주를 죽여 아버지 이성계의 눈 밖에 나는 바람에 새로운 나라 조선의 권력 중심부를 차지하지 못했던 이방원. 그러나 그는 권력에 대한 야심을 꺾지 않았다. 이 씨 조선 건국의 1등 공신 정도전 마저 죽이는 ‘왕자의 난’을 일으키고, 아버지 이성계를 끌어내린 후 끝내 조선 3대 왕(태종)에 오르게 된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앉은 정도전은 그의 ‘민본주의 이상 사회’ 구현을 위해서라도 권력의 화신이자 왕자인 이방원에 대한 견제를 확실히 했어야 했으나, 느슨한 위협 수준의 – 혹 이성계에 대한 예의였을까? – 대응이 결정적 패착이 되어 600여 년 동안 역사의 대역죄인이라는 누명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 수가 정도전의 결정적인 패착이었다. 그즈음 이방원은 측근인 하륜, 이숙번과 은밀히 거사를 결의하고 때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따라서 선제공격의 기회를 잡은 정도전은 이방원에게 견제나 위협의 수가 아니라 상상을 초월하는 결정적인 한 방, 즉 단번에 적을 거꾸러뜨릴 필살의 수를 써야만 했다. 결국 이 수를 쓰지 못한 탓에 정도전은 외려 이방원에게 당하고 말았다.
다음은 노무현이 대한민국 대통령에 취임한 지 한 달도 안 된 시점에 검찰개혁 방안을 논의해 보자며 TV로 생중계까지 했던 ‘노무현 대통령과 검사들과의 대화’에서 나온 박경춘 검사의 말이다.
과거에 언론에서 대통령께서 83학번이라는 보도를 봤습니다. 혹시 기억하십니까? 저도 그 보도를 보고 내가 83학번인데 동기생이 대통령이 되셨구나,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조롱이다. 노무현이 고졸이라는 건 만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었고, 오히려 고졸이었기에 그의 대한민국 대통령 당선은 '나 같이 평범한 사람도 살 수 있는 사회다', '반칙과 특권 없이도 이 사회에서 성공 가능하다'라는 희망을 쏘아 올린 일대 사건이자 신화였다. 그런 와중에 TV 생중계에서 대놓고 학번 운운한 것은 조롱이었다. 기득 세력에게 '대통령 노무현'은 마지막 남은 한 꺼풀 인간의 탈 마저도 벗어던지게 만든 대사변이었던 것이다. 무엇이든 반대, 묻지마 반대.
수구보수 세력의 물불 가리지 않는 반발에 그보다 더 강한 개혁 드라이브만이 노무현의 선택이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너그러웠거나, 생각이 너무 많았다. 실수였다. 하이에나들의 상상을 불허하는 사자의 강력한 한 방으로 제압했었어야 했다.
결국 노무현은 수구보수 패거리들로부터 피살되어,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정도전도 노무현도 실수 한 번 하지 않은, 무결점 인물이라는 말을 하는 게 아니다.
때로는 그가 정의의 이름으로 자행한 권모술수에 실망하여 책장을 덮기도 했다.
저자 조유식 또한 정도전의 실수에 실망했음을 이와 같이 밝힌다. 노무현도 태생적 한계에 따른 몇 가지 정책적 실수를 비롯한 측근 비리 등이 있었고, 이에 분노와 실망이 적잖았다. 그렇지만 그러한 것들이 그들의 진정성을 헤치지는 못한다. 그들의 결정적 패착, 실수는 승냥이들에 대한 느그러움 이었다. 역사의 강물을 맴돌게 했다. 그래서 유죄!
흐르는 강물처럼
닮았다. 닮아도 너무 닮았다. 무섭게 닮았다. 정도전과 노무현이 닮았고, 둘은 또 흐르는 강물처럼 닮았다.
정도전과 노무현은 수구세력과의 싸움에서 패배했을지언정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패배하지 않았다. 해서 역사의 강물이 되어 결국 바다로 흘러갔다. 흘러가다 막힌다고 포기하는 걸 보았는가? 굽어가고 돌아가고 맴돌다 가더라도 바다로 갔다. 그래서 무죄!
과거의 일들을 엮어 정리한 것을 역사라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아니하다. 역사는 절대 과거 완료형이 아니다. 현재 진행형이고, 순환이고 과정이다. 강물이 바다 되고 바다가 구름 되고 구름이 강물 되고 강물이 바다 되고 - "주체도 목적도 없는 과정"(알튀세르). 그래서 나는 경의를 표한다. 포기는 자연스럽지 않음을 알고 강물처럼 흐르다 간 정도전과 노무현 두 거인에게.
마지막으로 책과 저자에 대해서도 경의를 표한다. 『정도전을 위한 변명』은 600여 년을 반역죄인으로 산 정도전을 재조명하여 그의 명예를 복권시키고 역사를 바로 세운 역작(力作)이다. 그 외에도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을 깊이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수작(秀作)이다.
더불어 『정도전을 위한 변명』의 추천사를 썼을 뿐만 아니라, 이 책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는 박시백의 만화 『조선왕조실록』 또한 ‘역사와 나’라는 주제에 대한 걸작(傑作)이다. 두 책과 작가들께 경의를 표한다.
덧붙이는 글
정도전과 노무현 하면 떠오르는, 유달리 정도전과 노무현을 사랑하는 후배 부부가 있다. 하필 정도전이 야인 시절 유랑생활을 했던 김포에서 거의 매일 술잔을 기울이던 때가 있었다. 몇 년을 보질 못해 그립다. 정도전과 노무현을 닮은 후배 부부에게 연서(戀書), 이 글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