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북소리』의 무등에 올라타서
“몇 년 뒤에 다시 큰 비가 오면 또 무너지겠지.”
“무너지면, 또 다시 쌓겠지”하고 아내가 말한다.
그렇다, 그들은 벌써 몇 천 년이나 그 일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역시 그리스인은 될 수 없을 것 같다.
무라카미 하루키, 『먼 북소리』
쓰지 않는 것은 더 고통스럽다
작가인 무라카미 하루키는 말한다. 글을 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그렇지만 쓰지 않는 것은 더 고통스러웠고,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글은 써지 기를 원한다고 한다.
그렇지만 쓰지 않는 것은 더 고통스러웠다. 글을 쓰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글은 써지 기를 원하고 있다.
독자인 나는 이렇게 읽었다. 제대로 살아간다는 건 어렵다. 그렇지만 제대로 살지 않는 것은 더 고통스럽다. 사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삶은 제대로 살아 지기를 원한다.
제대로 산다는 것은 그러하지 않음으로 인해 빚어지는 고통에서 벗어나는, 제대로 살아 지기를 원하는 삶에 대한 예의다.
내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닫는 순간이 올 것이다
그땐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었다는 기억 때문에
슬퍼질 것이다
수많은 시간을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며
꽃들이 햇살을 어떻게 받는지
꽃들이 어둠을 어떻게 익히는지
외면한 채 한 곳을 바라보며
고작 버스나 기다렸다는 기억에
목이 멜 것이다
때론 화를 내며 화도 내지 못하며
무엇인가를 한없이 기다렸던 기억
때문에
목이 멜 것이다.
내가 정말 기다린 것들은
너무 늦게 오거나 아예 오지 않아
그 존재마저 잊히는 날들이 많았음을
깨닫는 순간이 올 것이다
기다렸던 것이 왔을 때도
상한 마음을 곱씹느라
몇 번이나 그냥 보내면서
삶이 웅덩이 물처럼 말라버렸다는
기억 때문에 언젠가는
조은 <언젠가는>
시인의 통찰이 뛰어나다. ‘오지 않을 버스를 기다리느라 먼 곳만 바라보다가 곁의 꽃들이 낮 햇살을 어떻게 받는지, 밤 어둠을 어떻게 익히는지 외면하며 살았다는 걸 알아차리는 순간, 울컥하고 목이 멜 것이다. 고작 오지도 않을 버스나 기다렸다는 후회 때문에’ – 삶에 대한 예의를 갖추지 않았기 때문에.
꽃을 보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오지도 않을 버스만을 기다리는 것은 더 큰 고통이다.
제대로 살아가기가 삶에 대한 예의라고 예를 갖춘 표현을 썼지만, 실은 숙명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일상생활에 얽매여서 속절없이 나이만 먹는 것을 피하기 위해, 생생하게 살아 있음을 원하는 삶을 위해’ ‘먼 곳에서 들여온 북소리를 듣고’ 숙명적으로 여행을 떠난다.
재치와 위트
무라카미 하루키는 일본에서는 물론이고 우리나라에서도 ‘하루키 신드롬’을 일으킬 만큼 베스트셀러 작가다. 한때 나도 그의 작품이 출판되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가 소식을 접하면 바로 달려가 구입해 읽었을 만큼 그의 작품에 심취한 적이 있었다.
그의 작품들에는 묘한 무언가가 있었다. 그로테스크한 소재들을 이용한 특유의 묘사는 꽉 막힌 젊은 가슴을 시원하게 뚫어 주기도, 그러나 더 먹먹하게 만들기도 했다. 신묘한 약들을 마구마구 섞어 놓는 것 같았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기어코 장년이 되어버린 나에게 그의 글들이 남긴 기억은 위트와 재치였다. 젊음은 가고 위트는 남았다.
흔히 익살이나 해학 정도로 이해하는 위트(wit)를 좀 더 있어 보이게 해석하면 ‘어떤 것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기발한 발상으로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는 재빠른 지적 활동’ 쯤 될 것이다. 기지에 해학이 더해지면 위트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제대로 산다는 것을 근엄과 진지심각 모드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심각한 오해다. 오히려 그 반대가 삶에 대한 예의일 수 있다. 위트와 재치야 말로 삶을 제대로 살아가는데 필요조건이다. 위트 있는 진지, 진지한 위트는 필요충분조건이다.
삶은 고통이다. 붓다, 쇼펜하우어, 니체까지 갈 것도 없이 삶이 어렵고 고통이라는 걸 우리는 체득으로 안다. 고통은 우리를 지치게 만든다. 삶에 대한 예의를 포기하게 만든다. 그래서 고작 버스 – 아파트, 자동차, 통장 계좌, 좋은(?) 대학 – 만을 목매고 기다리게 만든다. 더 깊은 고통, 아니면 염세.
삶이 고통과 염세로만 이루어져 있다면 돌파구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고통임을 이해하고 인정하자. 그리고는 니체의 차라투스트라처럼 외치며 웃으면서 건너 주자. “그래? 그게 삶이야? 그럼 좋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더!” 조롱? 아니다. 심각한 상황을 벗어나는 재치와 위트다. 통통 튀는 경쾌한 발걸음으로 고해(苦海)를 건너가는 물수제비다.
발렌티나는 우리에게 섬에 있는 셋집을 소개해 준다.
“별로 넓지는 않지만 아주 비유우우우우우우우티풀한 집이에요.” 그녀는 아주아주 감동한 표정으로 내 무릎을 탁탁 치며 말한다. 나와 그녀는 그랜드 브르타뉴 호텔 로비의 소파에 나란히 앉아 있다. 우리는 영어로 이야기하는데, 그녀는 어떤 일에 감동하거나 뭔가를 강조할 때는 단어 한가운데의 모음을 기이이이이이이이일게(길게) 끄는 버릇이 있다. 이 버릇은 전염성이 있는지 어느새 나도 모르게 따라 하게 된다.
우리가 얘기를 나누고 있자니, 조금 거만해 보이는 호텔 보이가 다가와서 뭘 마시겠는지 물었다. 그러자 발렌티나는 즉시 “노!”라고 대답한다. 이런 때, 그녀의 모음 발음은 아주 간결하고 명쾌하다.
일본을 떠나 유럽에 도착했을 때, 하루키는 피폐해 있었다. 반 강제적인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본을 도망치듯 떠나 유럽에 도착했건만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짐 트렁크와 함께 간 두통과 피곤함이었다. 피폐함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주거 문제를 해결하는 상황이 마치 삶의 일부를 축소시켜 놓은 듯하다. 그런데 하루키는 그 상황에서 일어난 일을 저렇게 위트 있게 정리해 낸다.(이후 발렌티나와 나눈 주거 문제에 대한 묘사를 직접 보시라. 짐짓 심각할 수 있는 상황들을 어떻게 위트 있게 넘어서는지)
그 토요일 아침, 환전 때문에 일어난 우리의 말다툼도(사실 말다툼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이 패턴대로 진행되었다. 인생관과 세계관의 차이가 너무나도 분명해서, 거기에는 이미 몇 천대의 불도저를 동원해도 메울 수 없는 숙명적인 갭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내 뒤에는 그리스 비극의 합창대 같은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인생이란 다 그런 것, 어쩔 수 없잖아요’라고 노래 부르고, 아내 뒤의 합창대는 ‘아니오, 숙명에 맞서 싸우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오’라고 노래 부르고 있다. 그리고 언제나 내 합창대가 아내의 합창대에 비해서 얼마쯤 소리도 작고 열의도 부족하다.
야무지지 못하고 뭐든 적당히 하는 하루키와 일상생활에서 조금만 뭐가 흐트러져 있어도 신경을 쓰는 아내의 성격으로 인해 가끔 다투는 부부싸움, 갈등을 저와 같이 위트 있게 표현한다. ‘몇 천대의 불도저를 동원해도 메울 수 없는 갭’으로 인해 다툰 후, 언제나 늘 자신이 지고야 마는 것을 ‘언제나 내 합창대가 아내의 합창대에 비해서 얼마쯤 소리도 작고 열의도 부족하다’라니.
이렇듯 『먼 북소리』는 생의 고단함을 위트와 재치로 넘어서는 상주적 여행기다. 비록 이 책뿐만 아니다. 전 작품이 다 그렇다고는 할 수 없지만 하루키의 글들에는 위트와 재치가 넘쳐난다. 위트와 재치는 자칫 위험할 수도 있는 삶에 빛과 소금이 된다.
상주적 여행자
재치와 위트 속에는 촌철살인이 있다. 짧지만 굵은 울림은 긴 감동의 여운으로 남아 제대로 살아지기를 원하는 삶의 자양분이 되는 것이다.
작가 하루키는 『먼 북소리』라는 여행기를 통해 그리고 글쓰기라는 작업을 통해 우리 인생을 일시적, 과도적으로 상주하는 여행이라고 표현한다.
글을 쓴다는 건 참 좋은 일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정말 좋은 일이다. 처음에 가졌던 자기의 사고방식에서 무언가를 ‘삭제’하고 거기에 무언가를 ‘삽입’하고 ‘복사’하고 ‘이동’하여 ‘새롭게 저장’할 수가 있다. 이런 일을 몇 번이고 되풀이하면, 나라는 인간의 사고나 혹은 존재 그 자체가 얼마나 일시적이고 과도적인 것인가를 분명히 알 수 있다.
막무가내로 다시 여행을 떠나고 싶어질 때도 있다. 하지만 나는 문득 이렇게도 생각한다. 지금 여기에 있는 과도적이고 일시적인 나 자신이, 그리고 나의 행위 자체가, 말하자면 여행이라는 행위가 아닐까 하고.
우리 인생은 잠시 상주하는, 그래서 돌아가야만 하는 여행이다. 아니 나 자체가 여행이라는 행위, 즉 동사다. 고작 오지 않을 버스만을 기다리며 돌아서서 목 메일 것인가, 소풍 같은 즐거운 여행을 하고 후회 없이 돌아갈 것인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천상병 <귀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