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자들의 도시』의 무등에 올라타서
만일 문에 먼저 불이 붙어 출구를 막아버린다면, 아무도 탈출하지 못할 것이다. 다행히도, 인간의 역사가 보여주듯이, 악에서도 선이 나오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그러나 선에서도 악이 나올 수 있겠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야기들을 잘하지 않는다.
주제 사라마구, 『눈먼 자들의 도시』
한 권으로, 그것도 재미있는 소설로 ‘인간 본성’의 심연을 들추고 다룬 『눈먼 자들의 도시』. 특이하면서도 경이로움 속으로 들어가 보자.
실명
『눈먼 자들의 도시』는 ‘실명’이라는 이름의 말이 이끈다.
영문도 모른 채 한 남자의 눈이 멀어진다. 운전하며 퇴근하던 차 안에서 느닷없이. 실명은 도시 전체의 사람들에게 옮겨지기 시작한다. 전염병. 재난 위기라고 판단한 당국은 실명된 사람들을 오래전에 폐쇄된 정신병동에 강제 격리시키는데, 그들 중 한 여자는 눈먼 남편 보호를 위해 자신도 눈이 멀었다고 거짓으로 당국을 속이고 그들 속으로 들어간다. 점점 많은 눈먼 사람들이 수용되는 가운데 단 한 사람만 볼 수 있는 상황! 그녀의 눈에 비친 인간 군상들의 리얼한 모습. 이기심, 약탈, 강간, 방화, 살인 ……
잃을 실(失), 밝을 명(明), 실명. 잃는 것이 반드시 밝음인지 어떤지는 깊은 논의가 필요한 흥미로운 주제가 되겠지만, 나는 밝음보다는 ‘잃다’에 방점을 두고 주목했다. 영어로도 ‘loss of eyesight’, 잃다는 의미의 loss를 사용한다.
잃다는 ‘~을 잃다’와 같이 항상 목적어와 짝을 이룬다. 무엇을 잃는 것일까? 밝음? 눈의 보는 기능? 아무튼 누군가에게서 무언가가 떨어져 나간다. 소유하고 있던 무언가가 나 또는 당신과 그에게서 사라져 없어지는 것을 ‘잃는다’고 한다. 소설은 실명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우리에게서 사라지는 것, 사라져야 할 것, 혹은 사라질 것도 없는 그것을 끌어내는 것이다.
나는 우리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사람 눈먼 사람이라는 거죠.
작가 주제 사라마구(José Saramago)는 에두르지 않는다. 직설적으로 분명히 한다. 잃었다가 다시 찾은 게 아니라 처음부터 없었고, 지금도 없다고 한다. 우리는 볼 수 있지만 보지 않는 – 눈먼 사람들이라고. 우리가 잃은 것이라 착각하는 그 목적어는 시력이 아니다. 밝음도 아니다. 우리 모두는 애당초 잃을 것도 없는 정신의 실명 상태다.
잃을 실(失), 이름 명(名), 실명. 이름을 잃다. 소설의 핵심 소재는 아닐지라도 또 다른 주요 장치 중에는 또 다른 실명이 있다.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없다. 그들, 운전자들, 그 남자, 그 여자, 의사, 첫 번째 눈먼 남자, 군인 등으로만 등장한다. 배경이 되는 도시 이름도 ‘눈먼 자들의 도시’ 일뿐이다. 모두 빛나는 주인공이고 버젓한 조연들일진대 그 누구도 이름이 없다. 이름을 잃은 것이다.
먼저 격리된 의사의 아내가 – 그녀만이 유일하게 볼 수 있다 – 이튿날 뒤이어 격리되어 온, 함께 쫓겨왔음에도 몇 명이 함께 왔는지, 누구와 함께 왔는지 조차도 볼 수 없는 사람들에게 번호를 부르면서 이름을 이야기할 것을 제안한 후의 장면이다.
그러자 세 번째 남자가 시작했다, 하나. 그는 잠깐 말을 끊었다. 그는 이름을 말할 것 같았으나, 나는 경찰관이요, 하는 이야기만 했다. 의사의 아내는 생각했다. 저 사람은 이름을 말하지 않는군, 저 사람도 여기서는 이름이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아는 거야. 다른 사람이 자기소개를 하고 있었다, 둘. 이어 그 사람도 앞사람의 예를 따라, 나는 택시 운전을 합니다, 하고 말했다. 세 번째 사람은 셋, 난 약국 직원입니다, 하고 말했다.
버림을 통한 채움이라니! 아이러니에 묵직한 전율이 인다. 작가는 빼 버림으로 웅변한다. 찰스라고, 소냐라고, 혹은 찰스라서 소냐라서 그 상황에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고. 소설 속 인간 본성으로 비치는 이러저러한 모습들은 인간 모두의 보편적 모습이지 특별한 경우에 해당하는 예외적인 개인들이 아니라는 걸, 그런 개인은 없다는 걸, ‘당신이 그’라는 걸.
마술적 사실주의
문장에서 부호는 쉼표와 마침표만 사용하며 대화와 대화 사이, 대화와 해설 사이에 줄 바꿈도 하지 않는다.
집에 당신을 돌봐줄 사람이 있소. 눈먼 남자가 대답했다, 모르겠습니다, 아내는 아직 퇴근을 안 했을 겁니다, 나는 오늘따라 좀 일찍 퇴근을 했는데, 그만 이런 꼴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두고 보시오, 심각한 게 아닐 거요, 갑자기 눈이 멀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소. 이런 꼴을 당할 줄도 모르고 그동안 나는 안경도 필요 없다고 자랑하고 다녔다니, 자, 자, 곧 저절로 다시 보이게 될 거요. 그들은 건물 입구에 도착했다.
주제 사라마구는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다. 그런 그가 문장부호 사용법을 무시하는 데는 다분히 의도적 이리라. 독자가 책을 읽는데 더 집중할 수 있도록 한 장치다. 물론 반대로 익숙하지 못한 나머지 포기할 독자도 있겠지만 개의치 않는다. 그러나 이 정도 이유를 찾았다고 만족하고 돌아서면 큰코다친다. 더 큰 이유는 마술적 사실주의(Magical Realism)에 있다.
문학에서 사용되는 기법 중 하나인 마술적 사실주의는 말 그대로 마술과 사실을 혼재시켜 놓는다. 일상에서 상식이라 일컫는 인과 법칙 등을 지키지 않는 등 환상적 내용이 주를 이룬다. 주로 정치적 억압이 심한 사회에서 위험한 표현을 순화시키는 요령으로 많이 활용되고 있다. 라틴아메리카 작가들에게서 많이 등장하는 것도 그 지역의 정치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콜롬비아 저널리스트이자 정치운동가인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Gabriel García Márquez)의 『백 년 동안의 고독』, 아르헨티나 소설가, 시인, 평론가인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의 『픽션들』이 있다. 우리나라에도 훌륭한 작품이 있다. 천명관의 『고래』는 앞의 책들과 함께 필독을 권한다.
무시된 문장 부호의 의도적 사용은 스토리, 즉 내용도 마술적 사실주의에 속하지만, 형식 또한 익숙한 현실에서 이탈시켜 마술의 세계로 안내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마술적 사실주의는 ‘마술+사실’이라는 상충되는 단어들의 말장난, 단지 허구의 재미를 위한 것일 뿐인가?
우리는 마술은 허구, 리얼리즘은 실제라는 공식을 의심 없이 살아간다. 그러나 한 번 생각해보자. 인간의 세계와 잠자리의 세계가 같은가? 다르다는 걸 우리는 잘 안다. 잠자리는 인간보다 훨씬 휘어진 공간, 즉 광각으로 세상을 본다. 뿐만 아니라 볼 수 있는 빛, 가시광선도 서로 달라 인간과 잠자리는 볼 수 있는 세상이 다르다. 잠자리와 인간까지 갈 것도 없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도 힘들이지 않고 발견되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어느 세계를 ‘실제 세계’라 할 수 있는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그 리얼리즘은 근대성 이후의 인간중심주의, 개인주의의 산물일 뿐이다. 내 능력으로는 알 수 없어, 내가 모른다고 실제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나의 세계 외에는 전부 마술, 허구가 아니라는 말이다. 실제는 여럿이다.
마술=실제, 리얼리즘=허구라는 터무니없는 몽니를 부리자는 게 아니다. 작가는 우리가 아는 인과 법칙만이 전부가 아님을, 우리가 안다고 믿는 사실의 한계를 인정하자고, 틀림과 다름의 차이를 ‘마술 같은 다른’ 세상을 가져다 알리려는 것이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
우리는 등장인물 중 한 사람을 각별히 주목해야 한다. 소설은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쓰였다. 그러나 작가는 전지적인 작가 자신 외 특별한 사람, 의사의 아내를 등장시킨다. 그녀는 모두가 볼 수 없는 와중에 유일하게 볼 수 있는 – 그래서 그녀만이 유일하게 안다(知) – 그러나 전지전능하지는 못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안고 있는 인물이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의 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다. 살아남은 것이 죄 되어, 죄책감으로 자신이 미워진 시 속의 화자처럼, 의사의 아내 또한 눈이 멀지 않고 살아남은 죄 때문에 “이건 끔찍한 일이에요, 진짜 재난이에요”라고 절규할 수밖에 없다.
의사의 아내는 그곳에 도착한 뒤 처음으로, 자신이 현미경을 통해 그녀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하는 수많은 인간들의 행동을 관찰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갑자기 그런 행동이 경멸스럽고 외설적으로 느껴졌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볼 수 없다면, 나도 다른 사람들을 볼 권리가 없어, 그녀는 생각했다.
의사의 아내는 그런 행동들을 잘 알고 있었지만 아무 말도 안 하는 것이 지혜롭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눈이 멀지 않은 것이 발각될 경우 일어날 결과들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적어도 모두가 그녀를 부려먹는 사태가 벌어질 터였고, 최악의 경우 그녀는 그들 가운데 일부의 노예가 될 수도 있었다.
눈먼 인간군상들의 밑바닥을 적나라하게 다 보면서/알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그녀는 독자와 자신을 같은 눈높이로 만든다. 즉 독자까지 살아남은 자로 만들어 소설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뒷짐 지고 있지만 말고 들어와서 함께 생각하고 해결해 보라는 것이다. 당신도 보고 있잖아!
살아남은 자들은 슬픔과 고통 속에서도 생각해야 한다. 과연 저들은 인간 이성을 잃은 저열한 동물에 그치는가? 잃어버린 것은 인간성이니 잃어버린 인간성을 회복하면 되는 것인가? 인간의 본성이란 무엇인가? 있기는 한가? 있다면 악인가, 선인가? 선이면 좋겠는데 과연 그런가?
근대 경험주의의 최고봉 흄(David Hume)이 따지고 파고들었던 것은 인간 본성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부터, 즉 절대자니 이데아니 등은 물리치고 인간의 본성을 제대로 알고 그것으로부터 모든 것을 시작하고 끝내자는 주장을 담은 주저가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다.
주제 사라마구가 흄을 읽었는지, 흄의 철학에 동의하여 책을 썼는지 어떤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이쯤 되면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는 수면 위로 드러난다. “맞소, 흄 선생. 선생의 말이 맞소. 그리고 소크라테스 선생의 말처럼 모든 시작과 끝은 너 자신을 아는 것이요.”
진선미
지금은 그렇게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지만 내가 어린 시절(청춘시절까지 그랬던가?), 우리나라 최고 미인을 뽑는 대회가 대중의 지대한 관심사이자 인기를 독차지했다. 물론 여성들만을 상대로 했다. 미인이라는 말에는 남자와 여자의 구분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무튼 그랬다. 아무튼 그래서 그런지 확신은 없지만 TV로 선발대회 생중계하는 날엔 거리에 사람이 없었다. 특히 성인 남성은 더 없었다.
매년 몸매, 화장, 인터뷰 등의 까칠한 기준을 통과해 뽑힌 최고 미인을 줄 세워 순서대로 각각 ‘미스코리아 진, 선, 미’라는 타이틀을 부여했다 – 봐라, 이것이 진선미의 기준이다!
우리는 세계(대상)가 있고, 그 세계를 있는 그대로 인식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진선미가 세상에 존재하고, 우리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인식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착각이다. 그렇지 않다.’고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가 말한다. 앞서 잠자리와 인간의 세계에서도 언급했지만, 인식하는 방식에 따라 세상은 다르게 나타난다. 즉 ‘세계가 인식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인식이 세상을 만든다.’는 것이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다.
‘진리는 주관이다’는 것이 칸트 사상의 핵심이다. 진리(眞), 선함(善), 아름다움(美)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이 추앙하는 3대 덕목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인식 방식이 진선미를 만드는 것이다. 그러니 주관이고 상대적이다. 허위, 악, 추 또한 마찬가지다.
의사는 두 번 길을 잃었다. 욕구가 점점 심해지는 바람에 상당히 괴로웠다. 마침내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느낄 무렵 간신히 바지를 내리고 변소에 쭈그리고 앉을 수 있었다. 악취가 코를 찔렀다. 물컹한 과육을 밟고 지나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변소의 구멍을 맞추지 못한 사람, 또는 다른 사람 생각은 하지도 않고 아무 데나 용변을 본 사람의 배설물이었다.
눈멀지 않은 사람의 시선에는, 즉 눈멀지 않은 사람의 인식에는 ‘역겹다’, ‘추하다’ – 실제 이보다 더한 묘사가 상당히 많고, 이런 리뷰는 꽤 많다 – 로 보이는 위와 같은 묘사를 하면서 작가는 과연 ‘인간성을 상실하지 말고, 눈멀지 않은 것에 감사 하’라는 말만 하고 싶었던 것일까?
주제 사라마구와 더불어 칸트는 말한다.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 아니, 인간은 인간이 가진 눈과 이성의 한계 때문에 세상 자체를 알 수 없다. 그러니 제발 다 안다고 착각하지 말고 ‘이성’이라는 이름의 말을 제대로 끄시오! 그 눈 똑바로 뜨시오! 그 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