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한 것으로부터 소유당하지 않기

『라깡의 루브르』의 무등에 올라타서

by 동사로 살어리랏다

정신분석은 우리 마음의 주인인 동시에 문명의 지배자인 그것을 무의식이라고 부른다.

백상현, 『라깡의 루브르』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라깡의 루브르』를 처음 접했을 때, 글은 디테일했고 의미는 악마 같았다. 불쾌했고 쇼킹했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The devil is in the detail)’는 보잘것없이 아주 작고 사소한 것이 아주 거대한 전체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의미로 쓰인다. 즉, 자칫 하찮게 보거나, 눈여겨 깊이 드려다 보지 않아서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지는 ‘불온한 존재들의 존재성’을 강조한 표현이다.


그렇다. 『라깡의 루브르』는 평소 존재하지 않는 것들의 존재성을 드러내 존재케 하는 백상현의 책이다.


그랬다. 『라깡의 루브르』가 나에게 불쾌와 불편으로 다가왔던 이유는 내게 평소에는 ‘감히’ 드러나 보이지 않던 ‘하찮은’ 것들이 불쑥, 그것도 때를 지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세게 몰아붙이더니 무너뜨렸던 것이다. 과연 악마는 디테일에 있었다.



마이너리거의 역전 만루홈런

나는 프로이트(Sigmund Freud)에 의해 체계화된 정신분석학 하면 ‘뒤집는다’라는 단어가 가장 먼저 연상된다. 열을 맞춰 ‘앞으로 갓’ 행진을 하는 무리들이 갑자기 ‘뒤로 돌아 갓’ 명령으로 졸지에 꼴찌가 선두에 서는, 존재감 없던 것들의 역전 만루홈런.


선과 악에 대해서, 아름다움과 추함에 대해서, 쾌락과 고통에 대해서, 사랑과 증오에 대해서, 평온과 불안에 대해서 우리를 사로잡는 고정관념과 오인의 베일들은 삶을 한없이 유한한 것으로, 자유롭지 못한 것으로, 특정한 심리적 힘에 종속된 것으로 만든다.


프로이트-라깡의 정신분석에 의하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나와 세계(선악 미추 호오 애증 善惡 美醜 好惡 愛憎)는 고정관념과 오인이라는 베일에 가로막혀 생긴 환상이요, 삶을 찌질하게 만든다. 그러나 프로이트-라깡의 정신분석은 인간의 오인과 환상을 분석하고 그것을 넘어서고 뒤집어 버린다.


위풍당당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모든 이들의 주목을 한 몸에 받던 메이저리거들(고정관념과 오인의 결과물들)을 퇴장시키고 지금껏 존재하지 않았던 마이너리거를 등판시켜 게임을 뒤집는 것이다. 새롭게 발탁된 정신분석학 팀의 역전 만루홈런 4번 타자 이름은 무의식.


의식에 의해 주체적으로 구성한 줄 알았던 자아와 그 대상인 세계는 무의식의 구조가 건설한 환상이며 오인이란다. 역전 만루 홈런이다!



라깡 X 루브르

책의 제목 『라깡의 루브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책은 라깡과 루브르 박물관의 콜라보다. 이런 구도를 잡아내는 아이디어도, 신박한 구도를 풀어낼 수 있는 지적 능력도 부럽고 부러울 따름이다.


책은 두 장의 습자지(習字紙)를 중첩시켜 쓰였다. 한 장의 습자지에는 라깡-정신분석의 지도를 그린다. 그리고 다른 한 장의 습자지에는 루브르 박물관의 지도를 그린 후 두 습자지를 포갠다. 포개서 드러나는 교차점, 즉 라깡-정신분석에 드러난 루브르 박물관,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라깡-정신분석의 이야기인 것이다.


이러한 콜라보가 가능한 결정적 이유는, 라깡-정신분석은 인간 모두는 예외 없이, 무의식 속에 욕망을 감추려는 특정 병리적 증세를 가지고 있음을 바탕으로 하고 있고,


유아기의 인간은 말을 배우는 단계에서 이들 세 영역 중 하나로 편입된다. 보다 구조적인 표현을 쓰자면, 인간은 자신의 주이상스에 대해서 신경증, 성도착증, 정신병의 세 가지 다른 포지션 중 하나를 취하게 되는 것이다.


문명-루브르 박물관은 당연하게도 그 무의식의 증세들을 가진 인간들에 의해 산출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라깡-정신분석은 정신병원 철창 너머 특정 환자에게나 사용될 법한 신경증, 도착증, 정신병을 인간이라면 누구나 무의식으로 가지고 있다고 선언한다.(처음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심히 황당할 수도 있겠으나, 당황하지 말지어다. 이 글을 쓰고, 읽고, 이해하고 있는, 소위 정상적인 사람들은 모두 신경증자로 분류되니. 다시 말해 이러한 증세는 모든 인간의 정신활동 자체다.) 또한 그런 병리적 무의식이 언제나-항상 발현되었음을 박물관 소장품들을 통해 밝히고 있는 것이다.


정신분석은 과거(기억)에 대한 발굴과 탐사 그리고 새로운 이름 붙이기 - 그래서 '마음의 고고학'이다. 저자 백상현은 개인의 숨겨진 과거(기억)를 파헤쳐 새롭게 탄생시키는 정신분석을 인류의 과거(기억)인 박물관에 적용시킨 것이다. (그렇다면 도서관은? 책들 또한 인류의 과거이지 않는가? 그렇다면 '라깡과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어떤가? 오호~ 흥미로운 매치업인걸!)


‘라깡’을 욕망을 감춘 병리적 무의식으로, ‘루브르’를 억압된 무의식이 발현된 문명으로 상징시킨, 완벽한 데칼코마니 『라깡의 루브르』.



잠들지 않는 무의식

전혀 의식되지 않은 가운데 나의 말이나 행동을 이끌어 내는 무의식은 농담이나 실수 그리고 꿈에 이르기까지 일상생활 전반에 보편적으로 존재한다.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무의식은 그러나 사회가 인정하기 어려운, 용납되기 힘든 욕망이나 통제되지 않는 충동(프로이트는 이 욕망을 성욕이라고 직시하고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언급)을 기원으로 하기 때문에 얼굴을 내놓지 못하고 억압과 은폐된 상태로 나타난다.


그런데 억압당하는 놈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억압하는 놈 또한 의식이 전혀 포착하지 못한다. 다시 말해 무의식적으로 억압한다. 무의식은 이종동체(異種同體) – ①‘쾌락원칙’에 따라 제멋대로 날뛰기 때문에 억압당하는 욕망-망나니(이드 id) ②그 욕망-망나니로는 사회에 나올 수 없으니 경찰을 자처하며 곤봉을 휘두르면서 억압하는 질서 파수꾼(초자아 super-ego) – 간의 전장이요, 그 전투의 결과물이 ‘금지된 것을 피하면서 쾌락을 추구하는’ 자아-의식(에고 ego)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나는 의식과 동일시될 수 없게 된다. 나는 초자아라는 ‘타자’가 요구하는 규칙을 엄수하는,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 결과물,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의식은 잠들어도 무의식은 언제나-항상 깨어 ‘나를 지배’하는 것이다.



언어화되기 이전의 언어, 언어화된 이후의 언어

프로이트의 무의식을 계승한 라깡은 정신분석을 언어와 연관성시켜 더욱 발전시킨다. 『라깡의 루브르』는 언어 이전의 언어와 언어 이후의 언어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언어는 문화(culture, 배양, 경작)다. 즉 시초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이 살기 위해 만들어낸 필연적 인공물이다. 그렇다면 언어가 있기 전의 언어는? 근원의 자리는?


근원의 자리, 시초의 언어는 무질서, 혼돈, 흐름, 움직일 동(動)이었다. 잡을 수가 없었다. 미끌리고 미끌릴 뿐이었다. 인간은 이를 견뎌낼 수가 없었다. 인터셉트(intercept) – 중간을 끊고 인위로 멈춰 세울밖에. 언어의 탄생.


환상인 언어-문화에 가려졌지만 그래도 실상은 살아있다. 무의식의 탄생.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비로소 살아갈 수는 있게 되었지만 근원의 자리는 상실된다. 이제 근원(고향)은 도달할 수 없는 자리가 된다. 상실의 탄생.


근원의 자리로 ‘나 돌아 갈래’를 외치지만 끝끝내 이르지 못하는 무의식의 병리적 쾌락의 반복, 언어화된 이후의 언어-인간의 탄생. 상실에 대한 애도의 탄생. 박물관의 탄생.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사랑

『라깡의 루브르』는 루브르 박물관 소장 작품들이 부른,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사랑 이야기다.


사랑과 삶이 공존할 수 없는 사랑, 이루어지지 않아야 살 수 있는 사랑, 이루어지면 미쳐버리는 사랑 혹은 미쳐버린 사랑, 그런 사랑이다.


근원의 자리를 그리워하는 사랑이다. 그 자리에 대한 욕망은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없는, 그래서 ‘억압과 은폐된 병리적 현상을 즐기면서 역설적으로 만족을 얻’는 사랑이다. 그래서 ‘고통스러운 쾌락’이라 부른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내 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네


시인과 촌장 「가시나무」 중


너무 많은 ‘나들’ 때문에 너에게 내어 줄 자리가 나에겐 없는 슬픔, 참 인상적이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은데, ‘내가 어쩔 수 없’고, ‘내가 이길 수 없’다. 내 소유라면 내가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어야 하고, 당연히 주인인 내가 이겨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다.


나는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


초자아(타자)의 욕망에 ‘의한’ 이드의 통제, 그 결과 자아(나)의 성립. 주체의 비주체성을 강조하기 위한 라깡-정신분석의 핵심이다. 스피노자는 ‘인간은 근원적 타율성에 대한 인식과 함께 진정한 해방이 시작된다’고 했다. 같은 의미다.


내가 소유했다고 생각하는 ‘자아, 주체, 세계(대상)에 대한 확실한 인식 능력 등’은 나의 것이 아니니, 수많은 타자들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내가 아닌 이유다.


또한 타자는 단수로 쓰더라도 항상 복수로 읽어야 한다. 그 타자도 언제나-항상 다른 타자들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타자가 나이고 나는 ‘나들’이 된다.



소유한 것들로부터 소유당하지 않기

『라깡의 루브르』는 무의식에 의해 조작된 ‘못난’ 인간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사랑하는 인간이 인간임을 알고, 그런 인간을 이해하고 넘어서려는 노력이다.


그것은 바로 인간 자신을 이해하고 넘어서는 것이다. 요컨대 그것은 나를 가두는 문명의 베일의 표면을 찔러낸 상처로부터 새로운 살과 근육이 생성될 수 있는, 새로운 나의 개념이 창안되는 가능성을 타진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루브르 박물관 유물을, 내 기억에 남은 유물을 명명된 대로 – 박제된 대로 감상 금지, 비록 내 살을 찢어 상처를 내는 고통이 있더라도 금지된 욕망까지 뚫어 보기.


‘새로운 살과 근육을 생성’시켜 ‘인간 자신을 이해하고 넘어서기’, 그래서 소유한 것으로부터 소유당하지 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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