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화과 꽃도 피었습니다

『자전거 여행』의 무등에 올라타서

by 동사로 살어리랏다

갈 때의 오르막이 올 때는 내리막이다. 모든 오르막과 모든 내리막은 땅 위의 길에서 정확하게 비긴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비기면서, 다 가고 나서 돌아보면 길은 결국 평탄하다. 그래서 자전거는 내리막을 그리워하지 않고 오르막을 오를 수 있다.

김훈, 『자전거 여행』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칼의 노래』 첫 문장이다.


일필휘지(一筆揮之), 김훈의 붓놀림 단 한 번에 내 무릎 푹 꺾이고 만다. 아, 어쩌란 말인가.



참을 수 없는 언어의 가벼움

김훈은 언어를 두려워한다.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에서 ‘꽃이’와 ‘꽃은’을 놓고 몇 날 며칠을 고민했다고 밝힌 사실이 대표적인데, 그가 주격조사 한 자를 놓고 고뇌의 밤을 보내야만 했던 이유는 글자 한 자에 세상이 뒤 바뀐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언어를 버린다. 형용사와 부사 등을 가급적 사용하지 않고, 중언부언하지 않는 글이 그의 글이다. 그래야 세상의 실상에 그나마 가까울 것이라 생각하는 것 같다.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라고, 김소월이 그 단순성의 절창으로 노래할 때도, 그 노래는 말을 걸 수 없는 자연을 향해 기어이 말을 걸어야 하는 인간의 슬픔과 그리움의 노래로 나에게는 들린다.


그러나 그는 또 언어로는 도저히 표현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기어이 언어로 표현해야만 하는, 참을 수 없는 언어의 가벼움으로 세상과 만나는 비애를 기어이 끌어안는다. 그래서 그의 글들은 언어를 버리기 직전의 울부짖음이 된다.


길은 어디에도 없다. 앞쪽으로는 진로가 없고 뒤쪽으로는 퇴로가 없다. 길은 다만 밀고 나가는 그 순간에만 있을 뿐이다.


언어를 버리기 직전의 울부짖음은 감정을 최대한 절제하는 절창(絶唱)이 된다. 긴장감이 고조되지만 의연함을 잃지 않고, 칼로 베는 듯한 날카로움 위에서 생동의 춤을 춘다.


『칼의 노래』의 부제는 또 어떤가.


이순신, 그 한없는 단순성과 순결한 칼에 대하여


‘당대의 어떤 가치도 긍정할 수 없었던 사내가 세상과 작별하며 부른 노래’ – 장군의 칼은 순결했음에 단순했고, 김훈의 글은 단순성의 절창이기에 순결하다.



다큐멘터리 시

자전거를 타고 저어갈 때, 세상의 길들은 몸속으로 흘러들어온다.

자전거를 타고 저어갈 때, 몸은 세상의 길 위로 흘러나간다.


김훈이 스스로 논픽션을 지향한다고 한 데에 나는 마냥 수긍만 할 수는 없다. 자전거를 타고 온 몸으로 삼천리 방방곡곡을 누비며 쓴 다큐멘터리 여행기(旅行記) 임이 분명한 글에서, 길은 자전거 앞바퀴를 따라 돈 후 내 몸으로 흘러 들어오고, 내 몸을 한 바퀴 돌아 다시 뒷바퀴로 흘러 나간단다. 자전거 바퀴의 길과 나와 세상의 길이 하나로 관통한단다. 저토록 압축적이고 아름다운 시적 문장이라니! 아,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


김훈은 시인(詩人)이다. 시의 눈을 가진 사람이다. 백상현이 『라깡의 루브르』에서 언어와 정신분석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한 말을 빌려와 보자.


우리는 개인사의 고유함을 포기하는 대가로 소통 가능성이라는 편리를 얻었고, 시인은 무한한 차이를 획득하는 대가로 보편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시인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언어 사용법을 상실한 대신 세상의 무한한 차이를 보는 능력을 획득했고, 우리는 소통 가능한 보편성을 얻는 대신 세상의 실상, 고유성, 무한한 차이를 상실했다. 우리와 시인의 게임의 법칙이 다른 것이다. 시인이 그 ‘단 하나의 오리지널리티’를 그들 언어로 풀어낸 것이 시다 – 사실 이래서 삶의 편의성만을 확보한 우리에게 시가 어렵게 다가오는 것이다.


시인의 눈으로 쓴 다큐멘터리, 그 축복의 세례가 『자전거 여행』이다.


풀의 싹들이 흙덩이의 무게를 치받고 땅 위로 올라오는 것이 아니고, 흙덩이의 무게가 솟아오르는 풀싹을 짓누르고 있는 것이 아니다. 풀싹이 무슨 힘으로 흙덩이를 밀쳐낼 수 있겠는가. 이것은 물리현상이 아니라 생명현상이고, 역학이 아니라 리듬이다.


여름 연못가에서는 아시아실잠자리가 가장 경쾌하고 발랄하다. 이 작은 날벌레의 본질은 동물이 아니라 공기나 빛에 가까워 보인다. 높이 날지 못하는 그것들은 연못가에서 부들이나 퉁퉁마디의 잎 사이를 흘러다닌다. 그것들의 비행 궤적은 한 줄기 가는 연기와도 같다. 그것들은 존재라기보다는 존재의 희미한 흔적이거나 생명의 잔영처럼 보인다.


빛과 바람에 몸을 절여가며 영일만 바닷가를 달릴 적에, 몸속에서 햇덩이 같은 기쁨이 솟구쳐올라, “아아아” 소리치며 달렸다. 삶을 쇄신하는 일은 결국 가능할 것이었다. 길이 아까워서 천천히 가야 하는데, 길이 너무 좋아서 빨리 가게 된다. 뒤로 흘러가는 바다와 앞으로 흘러오는 바다의 길을 “아아아” 소리치며 달렸는데, 새로운 시간의 바다는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일산 신도시는 수평의 삶을 수직의 삶으로 바꿔놓은 마을이다. 자전거를 타고 자유로 언저리의 논길을 따라 교하, 출판문화단지, 오두산전망대를 거쳐 곡릉천 쪽으로 달려갈 때 나는 10만 년 된 수평과 30년된 수직 사이를 기웃거린다.


주전파의 언설이나 주화파의 언설은 모두 가야 할 길을 확실히 제시하고 있었지만, 그 어느 길도 차마 갈 수 없는 길이었다. 남한산성 안에서 충(忠)과 역(逆)은 쉽게 구별되지 않았다. 충은 역처럼 보였고, 역은 충처럼 보였다. 충은 죽음이었고, 역은 삶인 것 같았지만 그 반대인 것도 같았다. 그래서 어떠한 말도 다 말이었으되 어떠한 말도 온전한 말이 아니었으니 양쪽 모두의 수사학은 비통하고도 절박했다.


힘겨운 추적과 취재가 있었으리라. 그에 앞서 깊게 들여다볼 수 있는 안목이 있었으리라. 그리하여 다큐멘터리 시가 된 것이리라.



읽기 혁명

사사키 아타루의 책,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왕왕 대량으로 책을 읽고 그 독서량을 자랑하는 사람은, 똑 같은 것이 쓰여 있는 책을 많이 읽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기도하는 그 시간에 읽어라, 혁명적으로 읽어라, 읽기가 혁명이 된다’를 주장하는 책인데, 그렇지만 ‘닥치고 다독(多讀)은 아니니 독서량 자랑 말고, 양서(良書)를 다양하게 읽어라’라는 의미의 문장이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에는 다음과 같은 법문이 있다.


진짜 양서는 읽다가 자꾸 덮이는 책이어야 한다. 한두 구절이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주기 때문이다.


김훈의 글들과 작품들이 그러하다. 읽기가 수월하지만은 않다. 길을 쉬이 내어 주지 않는다.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의 반복이다. 읽은 문장을 다시 읽고 덮기를 반복하게 되는 글들이다. 읽기와 덮기의 반복 끝에 마침내 얻게 되는 새로운 조망. 새로운 눈 뜨기. 읽기의 혁명.



꽃은 이렇게도 피더이다

자전거는 골목길 입구에서 멈췄다. 이번 자전거 여행의 마지막 길이 될 것 같다. 자전거에서 내려 좁은 골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어른 둘이 오가려면 어깨를 돌려야 겨우 비킬 수 있겠다.


집들의 어깨가 낮다. 낮은 어깨너머로 꽃 피지 않는 열매라는 이름을 가진 무화과(無花果) ‘꽃’들이 활짝 피었다. 열매가 꽃인 무화과로서는 억울할 일이다.


‘무화과 꽃도 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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