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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준가 Mar 22. 2017

낳지 않는 모성애

작은 생명들을 키우는 책임




비 오는 날 동네 목욕탕 옆에서 떨고 있는 걸 데려왔지요. 
한증막 옆에서 비 맞았다고 이름이 한비예요. 
지금은 한 12살인지, 13살인지 되었어요. 
밥은 사료 요만큼에 캔이랑 적당량 섞으면 돼요.
산책은... 우린 많을 땐 하루 세 번도 나가는데 하루 한 번만 해도 괜찮아요.
얘가 대소변을 밖에서만 보거든요.
혹시 종일 못 나가면 알아서 화장실 같은 데 가서 쌀 거예요.  



어느 노부부의 개를 한 달여 동안 임시 보호하게 되었다. 개도 늙었다. 어렸을 때 개를 기른 적이 있지만 그 개는 일곱 살 즈음 집을 나가 못 찾았다. 그러니까 이렇게 늙은 개는 처음이다. 암컷. 곱고 하얀 털과 작은 몸집으로 볼 때 말티즈 계열의 혼종인 듯했다. 보통의 하얀 개들이 그렇듯, 나를 보는 점 세 개를 금세 사랑하게 되었다. 


한비는 나이가 많아서 자기 생활 패턴이 뚜렷했고 인간은 그에 맞춰 주기만 하면 되었다. 강아지들처럼 함부로 짖거나 배변 훈련이 안 되거나 집기를 물어뜯는 등의 말썽을 일체 부리지 않았다. 그래도 개를 돌보는 일은 쉽지 않았다. 아침에는 평소 우리의 기상 시간보다 일찍 일어나 밥을 챙겨줘야 했다. 하루에 평균 두 번 산책을 나가야 했는데 배변이 달려 있으니 더우나 추우나 비가 오나 건너뛸 수가 없었다. 산책은 30분 이상이었고, 내가 지쳐서 집에 들어가고 싶어 해도 한비가 더 놀고 싶어 하는 날이 많았다. 들어오면 물티슈로 발을 하나하나 닦아줬는데 한비는 발을 닦기 전엔 집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얌전히 기다렸다. 며칠 주기로 목욕도 시켰는데 한 번 으르렁대지도 않고 잘 참아줬다. 이런 개라면 키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고되지만 사랑스러우니까. 그러나 한비의 사료와 캔과 간식 값을 생각하니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나이 많은 개는 쉽게 아프다. 병원비까지 감당할 자신은 없었다. 나는 내 음식과 병원비를 내기에도 돈이 모자란데 어떻게 다른 생명을 책임지나. 




애를 안 낳으면 니 인생은 망한 거야. 

결혼 전 엄마와 둘이 시장에 가던 길이었다.  

"엄마, 아이를 안 낳고 사는 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내가 질문하자 엄마는 

"그럼 니 인생은 망한 거야."

라는 강경한 답을 하셨다. 

평소 이렇게 세게 말씀하는 분이 아니라 무척 놀랐다. 왜 엄마는 아이가 없는 삶을 '망했다'라고 생각할까? 


문장을 바꾸어 보면 이렇다. '내 인생의 유일한 성공은 자식이야.' 엄마의 지난 삶을 생각할 때 어쩌면 저 문장은 가능하다. 엄마는 한때 전문직을 가졌으나 결혼 후 퇴직, 서울로 이주해야 했다. 시어머니뿐 아니라 시동생들과도 함께 살며 가사를 도맡았고, 아빠와 함께 사업을 했으나 결국 빚만 안고 마쳤다. 매일, 매달을 살아가느라 지치고 지쳐왔다. 그 과정에서 엄마가 가졌던 꿈은 하나하나 모두 부서졌다. 그런 엄마에게 큰 문제없이 자란 두 딸은 어쩌면 유일한 성공이라고 볼 수도 있다. 


내 삶은 엄마와 다르다. 엄마와 다른 시대를 살아간다. 미안한 말이지만 내가 가질 수 있는 성공은 엄마보다 많다. 그리고 이건 엄마와 아빠가 열심히 일해 교육시킨 결과다. 미안하다는 말은 내가 누리는 것들이 엄마 아빠의 노력에 기반을 두기 때문이다. 부모의 노력은 자식에게 들어가고, 자식에게 효력을 발휘한다. 정작 부모들은 큰 혜택을 받지 못한다. 그래서일 것이다, 지금의 부모들이 자식들의 인생에 지나치게 간섭하고 싶어 하는 마음은. 


어쨌든 나는 아이가 내 인생의 필수 요소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고등학교 때는 빨리 결혼하고 빨리 출산해서 '젊은 엄마'가 되겠다는 헛소리를 친구들에게 지껄인 적도 있지만(몇몇 친구가 지금도 그 얘기로 나를 놀린다) 지금은 전혀 아니다. 그때는 사회나 결혼이 이렇게 여성에게 기울어진 운동장인 줄도 몰랐고 출산도 단순히 많이 아픈 정도라고만 생각했다. 여성들의 삶이 이렇게 험난한 바닥 위에 서 있는 것인 줄 몰랐던 순진한 시절이었다. 


지금의 내가 아기를 낳지 않는 것은 두 가지 이유에 기반한다. 일단 아주 단순하고 명쾌하게, 돈이 없다. 아이를 낳고 양육할 여유 자금이 나에게는 없다. 임신 출산에 들어가는 병원비도, 출산용품을 살 돈도 없다. 이 두 가지 항목은 아이를 갖는 데에 필수적으로 들어가는 초기 자금이고, 그 이후는 더더욱 많이 든다. 나는 아이는커녕 개 한 마리나 고양이 한 마리를 키울 여력도 없다. 글쎄, 우리 부부가 둘 다 상근직을 갖고 남들만큼 받는 월급 생활을 한다면 여유가 생길 테지만 나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어떤 존재를 위해 지금의 내 시간과 삶과 여유를 희생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두 번째로 아기를 낳을 경우 우리는 틀림없이 더 가난하고 힘들어진다. 매우 확실하게 예정된 불행이다. 나는 임신과 출산을 거치며 건강을 해칠 것이다. 우리 부부는 작은 생명들을 사랑한다. 아이들도 예뻐한다. 아이가 생긴다면 그 아이를 온 힘을 다해 사랑할 것이다. 가난한 우리는 아이를 위해 무리하게 노력할 테지만 그 노력에 비해 아이는 또래보다 많은 것을 누리지 못하게 될 것이다. 좋은 옷, 신나는 장난감, 맛있고 건강한 음식, 질 좋은 교육을 가난한 우리가 제공해 줄 수 있을까? 그런데 아이에게 힘들고 불만족스럽고 가난한 미래를 준다는 것은, 현대 한국에서 진정으로 아이를 위하는 일이 아닌 것 같다. 트위터에서 이런 농담을 봤다.  

"낳지 않는 것이 바로 나의 모성애다." 







*현 시대의 가난을 주제로 글을 이어갑니다. 

다른 작가님들도 매거진에 참여하실 수 있도록 매거진을 열어 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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