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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준가 May 23. 2021

준가-1의 증명사진

2년 만에 화장한 날


프리랜서의 일은 다종 다양하다. 처음 프리랜서가 될 때만 해도 영락없이 책 원고만 만질 줄 알았지, 광고 문구나 콘티, 영화제 브로슈어, 홈페이지 텍스트, 전혀 모르는 분야의 논문, 시, 자기소개서 등등까지 다듬고 고치게 될 줄은 몰랐다. 하긴 그림 작가들만 해도 자기 작품을 하면서 광고도 그리고 책 삽화나 표지도, 영상에 쓰이는 원화도 그리지 않는가. 북디자이너도 책만 만들지 않고 패키지 디자인이나 전시 디자인, 패턴 디자인 등등 다양하게 활동하는 것을 보곤 한다. 편집자나 작가라고 해서 한 가지 일만 하라는 법은 없겠다. 오히려 빠르게 변하는 시대에 맞추어 새로운 방식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늘 한걸음 앞서간다는 것을 그동안 겪어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전혀 모르는 어떤 젊은 (나보다 어리면 다 젊다고 표현) 대표가 어찌어찌 나를 알고서 찾아와 깍듯이 인사를 건네고 노무사의 조언을 받아 작성했다는 용역 계약서를 내밀었을 때, 이제껏 처음 보는 단가 기준이 적힌 것을 보고도 나는 결국 계약서에 서명을 했다. 여기서 '처음 보는 단가'란 너무 낮거나 너무 높은 경우가 아니라 업계에서 흔히 쓰는 글자 수 기준이 아닌 영문 교정을 할 때처럼 단어 수로 책정한, 새로운 기준이었다.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전문 국문 교열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이 신생 업체는 교열자에게 요구하는 것들이 꽤 많았다. 내 이름과 경력, 나를 표현하는 한 줄 카피와 함께 예전에 거래한 사람들의 후기, 고객들에게 예시로 보여줄 수정 원고, 심지어 사진 촬영까지 요청했다. 아무리 개인정보가 고작 몇 원에 거래된다는 시대이지만 얼굴까지 까서 홈페이지에 올려야 하는 건지, 좀 부담스러웠다. 


나는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리면 소스라치게 놀라며 으악 소리를 내고, 집의 초인종이 울리면 잠에 푹 빠져 있다가도 용수철처럼 튀어 오른다. 사진을 찍는 건 너무너무 어색해서 돌처럼 굳어버리기 일쑤다. (아, 언제부터 이렇게 됐을까. 옛날에는 곧잘 예쁜 척을 하며 사진을 많이 찍었던 것 같은데. 그 시절이 벌써 까마득하다. 아마 이십대까지였을 것이다.) 코로나 시대에 줌 미팅이 자연스러워졌지만 남들은 잘만 하는 줌 미팅을 나는 코로나 1년이 지날 때까지 적응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내 얼굴을 화면에 비춘다는 게 생각만 해도 어색하고 오소소 닭살이 돋는 기분이었다. 그래 봤자 역시 대세를 못 이기고 슬슬 적응해서 이제는 뻔뻔하게 내 얼굴 잘 보이라고 책상 스탠드까지 켜 가며 줌 미팅을 하고 있지만. 





오늘은 바로 그 홈페이지에 올라갈 사진을 찍는 날이었다. 미리 정해진 스튜디오가 있었고 예약을 하고 찾아갔다. 너무 오랜만에 정식으로 찍는 사진이라 나는 얼마간 긴장이 되어 조금이라도 붓기를 줄이기 위해 일주일간 야식도 끊었다. (요즘엔 이런 걸 그럴듯한 말로 '간헐적 단식'이라고 한다. 야식 섭취가 어느새 일상이 되어서 건강 때문에 다이어트를 하긴 해야 하는 시점이었다. 이 김에 시작해 보는 거지 뭐.) 스튜디오에서는 간단한 헤어 드라이와 수정 화장을 해준다고 했다. 촬영 전날 문자 메시지로 준비할 사항이 상세하게 전달되었다. 

머리는 샴푸 후 건조 상태로 오세요. 왁스나 스프레이 금지. 

화장은 평소처럼 하되 파우더만 생략하세요. 제공되는 건 수정 화장뿐입니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화장을 덜하게 되었지만 그래도 미팅이나 중요한 자리에 갈 때는 그것이 예의라도 되는 양 화장을 했었다. 화장이 예의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행동은 생각을 따라가지 않았다. 울긋불긋한 피부를 감추려 애썼고 유난히 처지고 숱이 적은 눈썹을 보완하려 열심히 눈썹을 그려댔다. 그러다가 코로나가 와서 세상에, 전 세계의 모두가 마스크를 반드시 써야 하는 세상이 되었다. 화장이 예의가 아니라 마스크가 상식이 된 시대. 


마스크는 갑갑했지만 나는 그 덕분에 조금의 망설임마저 벗어던지고 기꺼이 맨 얼굴이 되었다. 이제는 어떤 자리든 막론하고 아무런 화장 없이 오로지 선블록만 바른 채 나가게 되었다. 외출 준비 시간이 현저하게 줄었다. 밖에서 중간중간 수정 화장을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그러다가 꼭 화장을 해야 하는 촬영 날이 온 것이다. 이 날마저 화장을 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이왕에 더 프로페셔널하게 보이려고 옷도 머리도 애쓰는 김에 화장도 해야겠지 싶었다. 화장대에 처박혀 있던 색조 화장품들을 꺼내 슬슬 발랐다. 이거 다 사용기한 넘긴 거 아닐까? 의심이 들었지만 하루뿐인데 뭐 어때. 이렇게 하루만 쓰는데 새것을 살 수도 없잖아. 그러고 보니 안 쓰는 화장품도 조만간 다 정리해 버려야겠다. 


스튜디오는 종각 근처 어느 건물의 지하에 있었다. 들어가니 그리 넓지 않은 공간에 인포데스크, 파우더룸, 촬영 구역, 탈의실까지 알뜰히 들어차 있었다. 촬영 구역 옆으로는 세 명의 사진사가 각자 컴퓨터를 두고 사진을 보정하고 있었다. 스튜디오에는 갈아입을 옷도 준비돼 있었는데 나는 평범한 셔츠 모양 블라우스를 입었기 때문에 그 옷을 입고 촬영하겠다고 했다.

가만히 시스템을 둘러보니, 각 사진사가 맡은 사람의 사진을 찍고 바로 이어서 파일 보정을 해주며 손님이 원하는 것도 바로바로 적용해주었다. 그러고는 파일과 함께 인화한 사진 몇 장을 전달하고 끝. 아주 빠르고 간략한 시스템이었다. 요즘은 이렇게 증명사진을 찍는구나. 최근에 이런 촬영을 해봤어야지. 운전면허 갱신용 사진이 필요할 때도 대충 집에서 사진을 찍고 포토샵으로 보정해 제출했다. 근 10년 정도는 이런 사진을 찍어본 적이 없었다. 


"이 업체로 출근을 하시는 거예요?"

내 사진을 보정해 주던 사진사가 문득 나에게 물어보았다. 사진을 의뢰한 업체에서 통일성을 위해 사진사도 지정한 것 같았다. 아니라고, 우리는 모두 프리랜서이고, 계약은 완료됐고, 출근도 하지 않고, 서로 만날 일도 없다고 알려주었다. 우리를 모두 만난 사람은 오직 대표뿐이고 그다음이 바로 사진사 당신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는 하하 웃더니 말했다. 

"그럼 보정을 많이 해도 되겠네요. 어차피 면접에서 거르는 것도 아닌데."  

기본적인 보정이 끝나고 사진사가 또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하라고 했다. 나는 갑자기 재밌어졌다. 

"여기 잔머리 좀 없애주시고요, 콧방울도 좀 줄여주세요." 


그리하여 받은 사진 속에는 마치 성형수술을 한 것 같은 내가 있었다. 아니 그걸 나라고 말할 수 있나? 눈을 키우고 얼굴도 갸름해지고 피부는 뽀얗고 다소 넙적한 코도 날씬해져 있었다. 나를 원본으로 해서 생성된 모르는 얼굴이 그 안에 있었다. 이럴 거면 그동안 야식은 왜 끊었담? 포토샵이면 다 되는데. (아니 저기요, 님 체중 늘어서 무릎 아프다면서요. 다이어트해야 된다면서요.) 면접을 앞둔 것도 어떤 증명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오로지 업무용 홈페이지에 올라간다는 용도 하나만을 위한 사진이기에 내가 내가 아니어도 딱히 상관이 없다. 오히려 나와 다를수록 더 좋다. 그 사진을 보는 사람들 중 실제의 나와 사진을 비교해 따지는 이가 있겠는가. 그냥 이런 사람이 교정을 봐주는구나, 하면 끝이다. 나는 의뢰된 교정을 잘 보면 끝이다. 오히려 어떤 한계가 나에게 가면을 만들어 주었다. 사진 제출을 요구받았을 때의 부담스러웠던 마음이 한 꺼풀 벗겨졌다. 이건 내가 아니니까. 나는 이 사진 속 준가-1의 뒤에 숨어 있으면 되니까. 


과한 보정을 사기라고 속임수라고 비난하는 사람이 많다는 걸 알고, 사실 나도 속으로는 어느 정도 그에 동조했지만, 이렇게 그 덕을 보고 나니 마냥 나쁘게만 볼 일인가 싶다. 누구든 한번쯤은 내가 아닌 나-1이 되고 싶을 때가 있지 않은가. 마음먹고 사기를 칠 요량이 아니라면 이까짓 파일 보정쯤 한번 마음대로 해도 되지 않을까. 내가 아닌 내 얼굴 몇 장을 들고 집에 와 책상 앞에 놓았다. 룸메는 사진을 보고 모르는 사람이라며 웃었다. 이 사람 나도 잘 모르는 사람인데, 오늘 그런 사람 하나 생겼을 뿐이야. 큰일도 별일도 아닌데 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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