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가 돌아가신 게 언제였더라? 언니가 1살 때부터 내가 직장인 3-4년 차가 될 때까지, 할머니는 큰아들 집인 우리 집에 사셨다. 그래서 언니를 봐주고, 나도 봐주고, 우리가 좀 큰 다음에는 큰고모네 아이들을 봐주셨다.
할머니는 내게 애증의 대상이다. 어렸을 때 부모님께 꾸중을 들을 때면 나를 보듬어주는 유일한 분이었다. 초등학교 3-4학년 때까지는 잠도 할머니 방에서 같이 잤다. 나는 "엄마-" 하지 않고 "할머니-" 하고 우는 아이였다. 그러나 그 애정의 반대편에는 늘 커다란 불편함이 자리 잡고 있었다. 왜냐하면 할머니는 우리 엄마를 미워했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나이가 드실수록, 내가 커갈수록 엄마 험담을 점점 더 많이 했다. 나에게.
사랑하는 할머니였지만 나는 엄마 편이었다. 늙어가는 할머니가 아무리 불쌍해도 나는 엄마 새끼였다. 매일 오만 것을 트집 잡아 엄마를 흉보시던 할머니가 유일하게 엄마를 칭찬하는 부분이 있었다. 함께 사는 그 오랜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월경하는 티를 낸 적이 없다는 점이었다.
우리 자매가 크면서 엄마, 언니, 나 집안의 세 여자가 월경을 하게 되자 화장실에서는 가끔 월경 쓰레기가 발견되었다. 주로 월경대 껍데기였다. (피 뭍은 월경대를 펼쳐 놓을 만큼 정신없는 사람은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더러운 것도 아니고 그게 뭐 그리 눈살 찌푸릴 일인가 싶은데, 그때는 야단을 맞고 잔소리를 들었다. 사실 나는 별로 그런 적이 없고 주로 꼼꼼하지 않은 성격인 언니가 그런 실수를 했다. 할머니는 그런 장면을 볼 때마다 엄마의 꼼꼼하고 깔끔한 뒤처리를 칭찬하곤 하셨다. 그 말을 들으며 '나는 절대로 실수하지 말아야지. 엄마처럼 뒤처리를 잘하는 여자가 되어야지.' 단단히 생각했던 것 같다.
언니는 우리 집의 첫째이고 성격도 불 같고 또 공부를 잘했다. 그래서 어른들도 언니를 어느 정도는 대우해 주곤 했다. 언니는 월경통이 아주 심한 편이라 그때만 되면 뒹굴거리며 소리를 질렀다. 약에 찜질에 엄마 약손에... 해줄 수 있는 건 다 해줘야 했다. (사실 통증은 내가 더 심한데 언니가 워낙 요란해서 엄마는 언니가 더 심한 줄 알고 있다.) 온 집안이 모를 수 없게 언니가 앓았기 때문에 우리 집의 유일한 남성인 아빠도 자연히 월경통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우리가 끙끙 앓고 있으면 아빠는 와서 "무슨 일이야?" 물었고 엄마는 "생리통이야."라고 담담히 대답했다. 엄마가 처음부터 아빠에게 그렇게 말했던 건 아니다. 처음엔 '그냥 배가 아프다'거나 '아유 그런 게 있어'라고 얼버무리기도 했다. 매월 매년 반복되면서 점점 더 편하게 "생리통"이라는 단어를 말하게 되는 것을 나는 곁에서 지켜보았다. 엄마는 월경통이 없는 분이라 아마 엄마는 정말 조용히 혼자 월경을 치르셨던 것 같다.
성인이 되면서 면월경대를 쓰기 시작했다. 생식기 쪽 피부가 유난히 예민해서 일회용 월경대를 하면 늘 발진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면월경대 세탁은 쉽지 않았다. 절차도 시간도 오래 걸렸다. 또 반드시 바싹 말려야 했기 때문에 며칠 동안이나 걸어두어야 했다. 나는 아빠가 내 월경대를 보는 것이 어쩐지 부끄러워 꼭 내 방에 걸어 말렸다. 그러다가 결혼을 했다.
룸메와 지내게 된 뒤 처음으로 월경 기간이 다가오던 날 나는 면월경대와 일회용 월경대를 펼쳐서 그에게 보여주었다.
"이제부터 너랑 나는 같이 사는 거고. 여긴 내 집이고. 나는 월경을 하는 사람이야. 그러니까 이제 너도 이것들을 보는 것에 익숙해져야 해. 이건 면월경대고 월경하는 동안 화장실에 담가 둘 거야. 빨면 여기에 걸어서 말릴 거야. 이건 일회용인데 면을 쓰기 힘들 때 가끔 써."
"응, 알았어."
나의 월경용품 소개를 그는 정확히 그리고 담담히 받았다. 그날 이후 나는 집안에서 훤히 보이는 곳에 월경대를 널었다. 화장실 수납칸에 비상용 일회용 월경대를 구비했다. 태어나 처음으로 월경에 대해 아무 거리낌 없이 생활할 수 있는 집과 가족이 생겼다.
최근 페미니스트 에디터 모임에서 한 가지 질문이 나왔다.
"생리/월경/정혈 중 편집자로서 어떤 단어를 선택하시겠어요?"
(생리-가장 보편적인 표현이라 두루 쓰기 좋음. 월경-역시 직접적인 표현은 아니지만 생리와 함께 의학적, 공식적으로 쓰이는 말. 생리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쓰임. 매달 하지 않는 사람도 있으니 다달이 한다는 의미가 딱 좋지는 않음. 정혈-최근 페미니스트들이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피를 내보내지 않는 월경 현상이 배제된 표현이라는 의견도 있음.)
나의 선택은 지금은 '생리'보다 '월경'이다(그래서 이 글에서도 딱 한 군데를 제외하고 모두 월경으로 기재하였다). '정혈'은 배제된 지점을 감안하더라도 당장 널리 쓰이는 표현이 아니기 때문에 일반적인 책이나 기사에서 선택하기에는 아직 이르다고 생각한다. 다만 의도적으로 해당 주제에 대해 깊이 다루는 글이라면 '정혈'을 일부러 선택할 수는 있겠다. 둘 다 에두르는 말이지만 생리보다 월경인 이유는 너무나 널리 쓰이는 '생리'라는 단어 대신 다른 단어를 선택함으로써 독자가 한번 더 이 말에 대해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이미 오랫동안 써온 단어이기 때문에 그리 어색하지도 않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은 뭘 고르실까요?) 우리 집만 해도 엄마, 언니, 나는 늘 '생리'라고 했는데 할머니는 늘 '월경'이라고 하셨다.
요즘의 나는 면월경대를 졸업하고(아직 갖고는 있다) 의료용 실리콘으로 만들어진 월경컵을 쓴다. 빨래의 괴로움도 쓰레기 걱정도 없이 세상 깔끔하다. 또 샐 걱정 없이 마음 놓고 잠들 수 있어 그 점이 가장 좋다. 월경컵은 적응에 시간이 걸리지만 한번 익숙해지면 결코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할 정도로 편하다. (강력 추천드립니다)
나는 sns에서 월경 얘기도 월경용품 얘기도 심지어 브라질리언 왁싱을 한 얘기도 거리낌 없이 쓰곤 한다. 가끔 '너무 드러냈나'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있지만, 자꾸 얘기하면 점점 더 아무렇지 않아진다. 월경은 숨길 필요가 없는 것이다. 자궁이 있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겪는 일이다.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고통받는 불편한 일이다.
아직까지 이 나라에는 내 월경통을 빠르게 속 시원히 해결해 주는 약이 없다. 놀랍도록 발전한 현대 의학이 왜 그런 약은 만들지 않는 걸까? 임신중지수술이 불법이던 때, 산부인과를 배우는 의학생들은 그것이 불법이라 중절술에 대해 제대로 배우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해외에는 초기에 약으로 임신 중지를 하는 방법이 널리 시행되었지만 한국에서는 그 약을 구할 수조차 없었다. (지금은 특정 단체를 통해 구할 수 있다고 알고 있다) 우리가 입을 다물고 있을수록 우리의 불편은 커지고 목숨은 위태로워졌다. 조금 민망하고 부끄러우면 어때, 우리의 목숨이 편안함이 우선이 아닌가. 조금 더 말하고 조금 더 나대기로, 오늘도 혼자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