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누구나 알 수 없는 아집에 빠질 때가 있다. 남들이 보면 도대체 이해가 안 가는 말이나 행동을, 스스로는 그게 이상하다는 걸 전혀 깨닫지 못하고 아무렇지 않게 하게 되는 때가.
나는 내가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해왔지만 볼달걀 사건 이후 앞으로는 스스로를 의심해야겠다고 다짐하게 되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대체 나는 왜 그랬을까.
유재석과 강호동 같은 사람들이 TV 예능 프로그램에서 시끄럽게 떠들던 시기였다.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가장 시끄러웠던 즈음. 그러니까 2000년대 초반 정도?) 연예인들은 토크쇼에 나와 개인기랍시고 신체를 이용해 사물을 흉내 냈는데, 말하자면 조세호가 자신의 뱃살과 배꼽을 양손으로 감싸며 "배 드세요."라고 한다든지 강호동이 자신의 볼을 500원 동전 크기만 하게 손가락으로 잡으면서 "계란 먹을래?"라고 하는 식이었다. 검지와 엄지를 이용해 동그라미를 만들어 자신의 볼을 동그랗게 꼬집는 행동. 그리고 그것을 "달걀"이라 주장하는 행동. 이것을 나는 '볼달걀'이라 부르겠다. 이해가 안 가는 사람을 위해 형편없지만 예시 그림을 그렸다. (옛날 유행이라서 요즘 20대는 잘 모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볼달걀을 볼 때마다 생각했다. "이걸 만든 사람은 정말 대단하다!"
왜냐하면 나는 정확히 저 부분을 달걀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코팅이 잘 된 프라이팬에서 달걀프라이를 한다. 앞뒤로 잘 뒤집는다. 노른자는 반숙이어야 한다. 절대 터지지 않았고, 덜 익은 노른자를 잘 익은 흰자가 얇게 감싸고 있다. 그 예민한 상태의 색깔이 바로 사람의 볼 색깔이다. 한국인의 허여멀건한 피부에 살짝 핏기가 도는, 연분홍과 노란색이 절묘하게 섞인 그런 색이다. 그 절묘함이 너무나 눈과 마음에 강하게 박혀서 나는 그만, 날달걀이나 삶은 달걀의 모양은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다. 당연히, 나 빼고 모든 사람이 볼달걀을 날달걀이나 삶은 달걀(어쨌든 껍질이 있는 상태)로 생각한다는 사실도 알 수 없었다. 누가 이런 농담을 일일이 설명하느냐구. 그냥 웃고 넘기는 거지. 그러니까 나 같은 사람이 세상에 존재하게 되었다.
나의 착각을 깨닫게 된 것은 그 농담의 유행이 지나고도 십 년은 더 흐른 뒤였다. 룸메랑 이야기하다가 문득 달걀프라이를 보고 볼달걀을 시도했던 것이다. 룸메는 그것이 삶은 달걀이라고 했다. 나는 달걀프라이라고 주장했다. 나는 고집을 꺾지 않았고 어이없어하는 룸메를 보며 내가 더 어이없다며 급기야 트위터에 투표를 올리기에 이르렀다.
결과는 당연히 나의 참패였다. 모든 사람들이, 내가 사랑하고 철석같이 믿고 있던 내 트친들마저도 그것은 삶은 달걀이라고 했다. 투표 결과를 보고서야 정신이 들었다.
'아, 내가 틀렸다.'
자고로 농담이란, 장난이란, 찰나에 빛난다. 한순간에 알아듣고 웃어야 한다. 그래야 소위 "터진다". 당연히 농담 속 달걀이라면 요리하지 않은 본래의 달걀이어야 한다. 흰자와 노른자는 물론 껍질까지 온전한 상태여야 한다. 내가 생각한 볼달걀은 요리를, 그것도 아주 조심스럽게 요리해야 가능한 상태였다. 정말 구차하지 않은가. 누가 이런 구차한 농담을 한단 말인가. 지금 다시 생각해도 얼굴이 붉어진다. 내가 너무 구차해서...
누군가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할 때 그 사람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맹렬히 비난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해' 말하고 조금 기다려주는 건 어떨까. 나 같은 사람이 또 있을 수도 있으니까. 뒤돌아보면 그 자신도 너무너무 부끄러운 순간일 테니까. 볼달걀이야 고작 농담일 뿐이고 누군가의 일상이나 어떤 사안에 영향을 끼치는 일은 전혀 아니니까 이렇게 웃고 넘길 수 있다. 그래서 하는 속 편한 소리일지 모른다. 하지만 본인이 깨닫기 전에는 정말 그렇게 말도 안 되는 고집을 피울 수가 있더라고.
볼달걀 사건은 거의 10년짜리다.
룸메는 오늘도 달걀프라이를 하는 내 곁에 다가와 내 볼을 손으로 잡고 말했다.
"이제는 알았지? 이게 왜 달걀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