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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룸메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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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준가 Jun 20. 2020

공기놀이



진짜 노는 날


프리랜서인 룸메와 나는 쉬는 날이 많지 않다. 이런 말을 하면 어떤 사람들은 "아무 때나 놀 수 있잖아?!"라며 눈을 동그랗게 뜨는데, 아무 때나 쉴 수 있다는 말은 곧 아무 때나 일해야 한다는 뜻. 마음먹고 시간을 조절하면 못 쉴 것이야 없겠지만, 별다른 일 없이 일상을 살아가는 프리랜서에게도 하루를 통째로 쉴 수 있는 날은 귀하다. 


어제는 진짜 노는 날이었다. 둘이 종일 침대 위에서 뒹굴거리며 넷플릭스와 유튜브를 번갈아 보고 놀았다. 졸리면 잤다. 매일같이 작업실로 출근해 조금이라도 일을 하는 사람들이라 이런 날은 정말 드물다. 놀고 나면 '사람이 일주일에 하루는 이렇게 놀아야 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지만 다음 주면 또 까먹고.  


놀다가 입이 궁금해 아이스크림 사 오기를 했는데 가위바위보에 져서 - 우리는 이렇게 중요한 결정들을 주로 가위바위보로 정한다 - 내가 가게 되었다. 벙거지 모자를 눌러쓰고 풍덩한 원피스를 입고 밖으로 나갔다. 집 근처에 있는 작은 슈퍼에서 아이스크림을 싸게 팔아, 자주 사 먹곤 한다. 꼬깔콘 한 봉지를 고르고 아이스크림을 몇 개 고르고 나니, 며칠 전부터 하고 싶었던 공기가 생각났다. 어렸을 때 학교 바닥에 주저앉아 친구들과 하던 공기놀이 말이다. 마침 이곳은 초등학교 앞. 쫀드기와 아폴로, 슬라임 옆에 공기가 있었다. 



'공기놀이'와 '공기놀이하다'는 모두 사전에 등재돼 있으며 붙여 쓸 수 있다. 



두 종류의 공기가 구비돼 있었는데 한 가지는 6알들이 500원, 다른 한 가지는 10알들이 1000원. 가격도 가격이지만 10알들이는 플라스틱 케이스에 태극기 꽂힌 독도 사진이 붙여져 있었다. 이상하게 '국뽕'에 약한 나는(그런 걸 보고 있자면 어딘가 조금 창피한 기분이 든다) 6알들이 500원짜리 공기를 샀다. (아, 500원. 나는 500원짜리가 왜 이렇게 좋지? 너무 귀엽지 않나요, 500원. 나 500원짜리 동전도 좋아해.) 



가장 먼저 하는 일


공기를 사면 놀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 공기 안에는 작은 동전 같은 쇳덩이들이 들어있는데 이것을 재분배해야 한다. 여섯 알짜리를 샀으면 하나를 열어서 그 안에 있던 쇳덩이를 다 꺼내 나머지 다섯 알의 공기에 나누어 넣는다. 각 공기의 무게를 조정하는 것. 공기를 무겁게 할수록 무게중심이 잡혀서 놀이하기가 수월하다. 어렸을 때 공기를 더 무겁기 하기 위해 쇳덩이들을 하도 담아서 뚜껑이 잘 안 닫히던 기억이 난다. 이번에도 당연히 맨 먼저 공기를 여는데.... 아니? 안 열린다? 왜? 요즘 애들은 공기 세팅 안 해? 아무리 힘을 줘도 손톱을 비집고 넣어봐도 안 열려. 이럴 수가. 이를 어째? 


뭐 할 수 없지. (의외로 금방 포기)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지금도 아주 가벼운 편은 아니니까 그런대로 참고 시작해보자. 아니 그런데 이번에는 공기알이 미묘하게 컸다. 뚜껑이 안 열리는 것도 불만인데 살짝 커서 손에 잘 안 잡히고 쉽게 손에 익지를 않는다. 요즘 애들은 다 손이 큰가? 설마 나보다 크진 않을 텐데. 그래, 이것도 익숙해지면 괜찮을 거야.   

   


공기는 동네마다 달라


건들기, 백두산, 알까기, 박수, 물레방아, 아리랑, 쌀 씻기... 이것들은 모두 공기 규칙 이름이다. 이보다 훨씬 많은 용어가 있지만 나도 잘 모르기 때문에 한번 이상 들어보거나 써본 것만 적었다. 건들기는 공깃돌을 집을 때 다른 돌을 건드리지 않는 규칙이고, 백두산을 본인의 머리 높이 이상으로는 공깃돌을 높이 던질 수 없다는 뜻이다. 박수는 꺾기 하면서 중간에 박수를 쳐서 난이도를 높이는 방법, 쌀 씻기는 꺾기 할 때 손 위에 놓인 공기를 흔들어 위치를 조정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런 이런 이름도 뜻도 동네마다 무리마다 달라서 내가 아는 것과 당신이 아는 것은 다를 수 있다. 그게 공기다. 

룸메는 충북 단양에서 초등학교 때 서울 망원동으로 전학을 온 사람이고, 나는 망원동 토박이 출신. 우리의 룰은 조금씩 달랐다. 먼저 대충 연습을 마치고 10년 내기를 했다. 서로 다른 룰을 맞추어 가며 "야, 그런 건 OO에선 어림도 없거든?" 하며 잘난 척도 해가며. 

아니 그런데 내가 진 거야. 나 왕년에 백 년도 우습게 치던 사람인데! 이건 다 공기 탓이야. 아무렴 그렇지. 내가 너무 아쉬워하자 룸메는 한 판을 더하자고 했다. 똑같이 10년을 내기했는데 이번엔 내가 이겼다. 휴, 그래 앞으로 연습을 열심히 해야겠어. 누구랑 언제 붙을지 모르지 실력을 갈고닦아야지. 모쪼록 꼰대의 저력은 이런 전통놀이에서 발휘되는 거 아니겠어? 

 


고무줄 못하는 사람


트위터에 공기를 샀다고 사진을 올리자, 홍시 언니가 댓글을 달아주었다. "와, 나는 공기 하는 사람이 제일 신기해. 그걸 어떻게 던졌다가 그 사이에 주워서 받을 수 있지?" 그러고 보니 공기 안 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일종의 저글링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저글링은 나도 못해. 세상 신기.) 

그런데 나는 반대로 고무줄이 그렇다. 머리 위로 10단까지 올라가는 고무줄을 보고 있으면 친구들이 참말 대단하게만 느껴졌었다. 나는 무릎 높이도 겨우겨우 하고 그마저도 자주 틀렸는데. 공기를 신기해하던 홍시 언니는 역시 고무줄을 8단까지는 했다고 한다. 서로를 신기해하는 고무줄파와 공기파. 

그때 같이 놀던 친구들 지금은 뭘 하는지 전혀 모르지만 다들 자기 성향에 따라 살고 있겠지. 공기파는 이렇게 집에서 공기를 할 수 있는데 고무줄파는 뭘 하려나. 고무줄 하기 쉽지 않은 세상이잖아. 코로나 때문도 그렇고 층간소음도 있고. 


오늘도 일하다가 짬이 나면 공기를 해야지. 거실 러그를 걷고 바닥에 주저앉아서. 이제 바닥 청소에 조금 더 신경 써야겠군. 그런데 아침부터 자꾸 손목이 찌릿찌릿 아프다. 아이고 나날이 놀기도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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