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원 어게인, 전복죽과 만춘서점
지네가 또 나타났다!
어제의 지네는 아침에 일어나니 거실에 널부러져 있었는데, 오늘의 지네는 새벽에 유가 화장실을 가다가 발견하고 소리를 질러서 나도 깨어 봤다. 어제의 지네보다 더 컸다. 우선 급한 대로 종이와 무거운 물건으로 눌러 놓고 잠이 들었다. 꿈에서 지네가 내 이불 속으로 들어왔다. 너무 무서워서 으아아... 하며 움직이질 못하고 있는데, 팔에 따끔, 하는 감각이 있었다. 지네가 물었다. 정말 깜짝 놀라 꿈에서 깨 벌떡 일어났다. 이불을 탈탈 털어봤다. 꿈이라 얼마나 다행인지. 휴. 쓰던 바이오킬(제주에서 많이 쓰는 용한 벌레약)도 바닥나고 오늘은 새로운 약을 사러 가자며 유와 다짐했다. 동네 언니 말씀이, 실제로 지네는 따뜻한 이불 속을 좋아해서 많이 들어온다고 한다. (으악)
오늘 윗집 언니와 점심 약속이 있는 날이다. 윗집 언니는 지난번 유를 문 개의 주인으로, 유의 병원 치료가 끝나는 즈음에 점심을 함께 먹기로 하였다. 유는 오늘 마지막으로 병원에 가고, 나는 차를 얻어탈 수 있는 기회에 한의원에 한번 더 가기로 했다. 세화한의원의 점심시간은 12시 30분인데 내가 거의 12시 경에 도착해서, 오늘은 침만 맞게 되었다. 오히려 윗집 언니와 유가 나를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되어서 다행이었다. 20분 만에 치료를 끝내고 다같이 약국에 갔다. 지네에게 듣는다는 바퀴벌레약(모든 뿌리는 약 중 가장 세다고)과 지네의 접근을 막아준다는(정작 약사는 별로 효과가 없다고 했지만 우리들 마음의 안정을 위해) 붕산을 샀다. 바이오킬도 한 통 더 사려고 했는데 근방의 젊은이들이 너도나도 다 사가서 품절이라고 했다. (다들 지네 선생을 만났나)
점심은 근방의 맛집인 오조리 해녀의 집에서 전복죽을 먹기로 했다. 가는 길에 잠시 김녕 바다에도 들러 에메랄드빛을 구경했다. (우리가 저런 바다빛을 이번에 전혀 못 봤다고 하자 언니가 일부러 세워 주셨다. 감사합니다.) 김녕은 제주 바다 중 가장 바람이 세다고 한다. 과연 사정없이 몰아치는 바람이었다. 윈드서핑을 하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해녀의 집에 도착해 전복죽 세 개를 시켰다. 원래 밑반찬이 맛있다는데 오늘은 별로라고 한다. 하지만 전복죽은 맛있었다. 내장을 넣어 걸죽하게 끓였는데 아주 고소했다. 전복 살도 다지지 않고 큼직하게 썰어 넣었다. 윗집 언니 말로는 근방의 어느 식당에 가도 이 정도의 전복죽 맛은 나온다고 했다. 그렇다면 다음에는 가까운 세화리의 식당에서 먹어야겠다. (관광객의 자세로 맛집에 한번 와봤다...)
다음 코스는 함덕에 있는 만춘서점. 윗집 언니가 살 책이 있다고 하셨다. 만춘서점은 어렴풋하게 들어본 이름인 것 같았는데 가보니 아주 작고 깔끔하고 좋은 향기가 나고 느낌이 좋았다. 건물도 작은 네모로, 예뻤다. 독립 출판물보다는 일반 출판물이 많았다. 윗집 언니는 민박을 운영 중이어서, 손님들을 위한 책을 여러 권 골랐다. 유는 최근에 나온 어느 소설가의 책을 샀다. 만춘서점을 보니 이런 서점 참 좋구나, 하는 마음이 절로 들었다. 어떤 서점에 가면 힘들어 보이는데, 어떤 서점은 한없이 아름다워 보인다. 무슨 차이일까?
다음으로 함덕에 있는 '델문도 인 제주'에 갔다. 1박2일인지 런닝맨인지 하여튼 무슨 방송 촬영을 했다고 한다. 입구부터 야자나무가 줄줄이 서 있고 유명한 해변의 금싸라기 땅에 자리잡은 휴양지 느낌의 카페였다. 나는 이 카페 이름을 듣고 "아!" 했는데, 내가 아는 델문도는 홍대 골목에 있는 오래된 카페이기 때문이다. 홍대의 델문도는 생긴 지 아주 오래 되었고 어느 일본인이 일본식 음료와 디저트, 식사를 팔던 곳이다. 아는 사람만 알던, 간판도 없이 오래도록 비밀 기지처럼 운영되던 델문도를 참 좋아했다. 분위기도, 맛도, 가끔 카페에 나와 있던 리트리버 유바도 좋아했다. 지금은 오래 일한 스텝이 인수해 이어서 운영하고 있다. 제주의 델문도와 홍대의 델문도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무엇이 좋고 안 좋고라기보다는 지향점이 완전히 다른 카페다.
집에 오니 당이 떨어져서 급히 비스킷 한 조각과 커피를 마셨다. 오늘 윗집 언니도 우리를 데리고 다니시느라 많이 피곤하셨을 것 같다. 나는 발목 부상으로 며칠째 병원 외에는 가본 곳이 없는 와중에 너무 감사한 나들이였다. 제주에 오면서 매일 바다를 보며 여유를 찾으려고 했는데, 뜻하지 않게 노트북 모니터와 마당의 고양이만 보고 있으니.
한의사가 이번 주까지는 걷지 말고 쉬라고 한다. 그래야 예후가 좋을 것이라고. 냉찜질을 이제 그만해도 되냐고 물었더니 이제 온찜질로 바꾸라고 했다. 붓기는 거의 가라앉았다. 통증은 아직 있다. 빨리 나아서 열심히 걸어다닐 수 있기를. 지네는 더 안 보기를. 지네 너무 무서워. 너무 커. 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