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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준가 May 26. 2017

29일

발목이 발목을 잡아




제주는 아름다운 곳이다. 산책하기에 더없이 좋은 고장. 처음 제주에 올 때 가진 작은 바람은 매일 동네 산책을 하,고 작고 향기로운 카페에 가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바다를 한참 동안 바라보기. 어디 좋은 곳에 일부러 가지 않더라도 지금 작은 풍경을 누리고 듣고 맡을 수 있는 것. 살아보듯 여행하는 일. 정말로 조금은 살아보는 일. 한달 넘는 일정 동안 질리도록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이렇게 갑자기 발목을 다쳐 집안에 있을 줄은, 다른 이의 도움 없이는 동네 구경 나가기도 힘든 시간을 보낼 줄은 꿈에도 몰랐지. 

발목을 다친 게 5월 3일이니까 오늘로 18일째. 당초 2주면 넉넉히 나을 거라 예상했지만 계속 상태가 오락가락하며 아직 마음을 놓지 못하고 있다. 아르바이트도 모든 계획도 다 그만두고 찜질과 마사지에 바쁘다. 사실 통증 자체가 전혀 못 걸을 정도는 아니고 참으며 절룩거리며 걸을 수는 있다. 하지만 발목 인대라는 부위의 특성상 지금 치료와 재활에 소홀히하면 평생 아플 수 있으니까 그 긴 시간이 두려워 움직이지 않으려는 나다. 택시를 불러 다닐 수야 있겠지만 그러면 돈이 너무 많이 든다. 발목을 다쳐 애써 좋은 점을 찾아보자면 덕분에 의뢰처의 수정 요청에도 바로바로 반응하고 육지에서 만들다가 온 전자책도 꾸준히 만들고 있다. 친구의 독립출판 상담도 열심히 해주고 혹시 6월에 언니네 가족이 올지 모른다고 하니까 아이 동반이 가능한 근처 숙소도 재빨리 찾아주었다. 무엇보다 외출 때마다 우리를 데려가 주시는 윗집 언니와 친해져서 좋다. 감사한 마음뿐이다. 

다쳤다고 하면, 게다가 3주째 잘 못 걸어 다닌다고 하면 엄마가 많이 걱정하실 것 같아 말을 못했는데 오늘 언니와 다른 일로 통화하다가 그만 발목 부상 소식을 발설하고 말았다. 경계가 느슨했어. 언니가 엄마께는 안 전했으면 좋겠는데. 


아침에는 어제 저녁으로 먹고 남은 식빵에 잼을 발라 먹고, 점심으로는 그제 유가 만든 구운달걀카레 남은 것을 해치웠다. 저녁으로는 새롭게 만든 카레를 또 먹고.(그래도 맛있었다) 저녁을 일찍 먹었더니 배가 고프다. 하지만 이미 다 씻고 치실도 하고 양치도 했으니까 좀 참아봐야지. 

저녁 나절에 잠깐 마당에서 노을을 봤다. 황금색의 아래 하늘과 분홍빛으로 물든 중간 하늘, 하늘색의 윗 하늘이 섞이고 이를 구름이 한꺼풀 감쌌다. 고양이들이 나를 보고 다가왔다가 밥을 주니 조금씩 먹고 나서 곧 저희들끼리 어울려 놀았다. 첫째 니은이는 잠시 혼자 떨어져 노을 구경을 했다. 

어제 오른쪽 눈에 문제가 있던 막내 이응이는 오늘 확실히 호전돼 보인다. 어젠 제대로 뜨지도 못했는데 오늘 아침에는 약간만 작게 뜨다가 저녁 즈음엔 거의 정상으로 돌아왔다.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그런데 이 녀석이 웬일로 이틀 연속 집에 있지? 역시 몸 아프면 집이 최고야.  

씻으러 욕실에 들어갔는데 작고 아주 까만 거미가 벽에 붙어 있었다. 거미는 익충이니까 잘 안 잡는다. 놔두고 씻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다리 여덟 개가 아닌 것 같았다. 뒷다리가 지나치게 컸고 앞의 것은 다리가 아니라 더듬이였다. 그것은... 곱등이 새끼였다. 큰 곱등이가 여러 번 욕실에 나타났었기 때문에 그 새끼를 본 순간 소름이 끼쳤다. 주변을 둘러보자 변기 옆에 두 마리, 세면대 옆에 두 마리가 더 있었다. 서둘러 샤워기를 이용해 수채구멍으로 흘려 보내긴 했지만 기분이 시원치 않다. 본래 알이란 엄청 많이 모여 있지 않은가. 근처에 알을 낳았다면 이게 끝이 아닐 수도 있다.  



혼자 노을 보는 니은이 

오른쪽 눈이 많이 나아진 이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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