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엔 룸메와 함께 영화 <윤희에게>를 보았다. 오타루의 아름다운 설경과 시원한 바다 옆을 달리는 기차, 밤하늘에 떠오르는 예쁜 달.
윤희와 새봄 / 쥰과 마사코의 관계는 닮았다. 다른 가족과 떨어져 둘이 의지하고 살아가는 관계. 둘은 아는 것을 모르는 척하기도 하고 서로의 삶에 과감하게 개입하기도 한다. 윤희와 쥰에게는 서로가 없었지만 새봄과 마사코가 있어서 그래도 이만큼 온 것이 아닐까.
영화를 보면서 유독 인물의 말이 대칭되는 지점들이 들렸다. 사진, 달 그리고 연인에 대한 말들.
"엄마는 아빠 만나기 전에 연애해 본 적 없어?"
"있지."
"어떤 사람이었어?"
"가까이 가면... 항상 좋은 냄새가 났어."
-윤희와 새봄
"고모, 연애해 본 적은 있어?"
"젊었을 때?"
"어떤 사람이었는데?"
"중학교 선생님이었어. 가까이 가면 화장실 방향제 냄새가 나던 사람."
-쥰과 마사코
들으며 나도 예전의 관계들을 떠올렸다. 그들의 냄새.
K에게서는 항상 비누 냄새가 났다. 그 냄새가 너무 좋아서 가까이 있으면 그의 옷에 코를 묻고 싶은 욕구를 참아야 했다. 나중에 알았는데 그 냄새는 그의 어머니가 쓰시는 섬유유연제 냄새였고 걔네 집의 모든 옷에서 똑같은 냄새가 났다. 신기하지. 그 사실을 알고 나니 더 이상 그의 냄새가 매력적이지 않았다.
Y는 SNS에서만 보던 사람이었다. 어느 날 책 만드는 사람들이 모여 여는 마켓에 갔는데 그는 중고 옷을 팔고 있었다. 여름 원피스 하나와 니트 하나를 샀다. 세탁한 지 오래된 것 같았는데(세탁을 한 것 같지만 그 시점이 오래 됐다는 뜻) 묘하게 매력적인 냄새가 났다. 향수 냄새 같았다. 내가 한번도 맡아보지 않은 미지의 향수. 이런 냄새를 맡으면 이상하게 그가 다른 세계의 사람처럼 느껴진다. 내가 모르는 향기와 내가 모르는 공간이 펼쳐지는 듯하다.
J는 기억에 강하게 남은 사람이었지만 그에게서 기억하는 건 구토 냄새다. 종종 그는 토사물 냄새를 풍기곤 했다. 알고보니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면 토하는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왜 그렇게 자주 토했을까. 식도는 괜찮았을까. 지금이라면 병원에 보냈을 텐데 그땐 나도 어려서 다독일 줄을 몰랐다.
돌아서면 사라지는 냄새처럼, 한때의 관계들도 돌아보면 알알이 흩어져 있다. 더 이상 연락이 닿지 않는 관계들. 한때는 좋아하고 서로를 아꼈던 시간들이 이제는 흔적도 없어졌다. 오로지 내 기억 속에는 주관적 감각들만이 남아있다.
인호의 청첩장을 받아든 윤희의 한마디
"축하해, 당신. 정말 잘됐다."
그 말은 인호에게 일종의 큰 슬픔이었겠지만 윤희에게는 진심과 안도 그리고 이제야 가질 수 있는 우정의 말이었을 것이다. 두 사람은 앞으로 더 편안해질 수 있겠지. 가끔 나도 옛 친구들이 그리워지지만 흘러간 것은 흘러간 대로 두는 게 좋을 때도 많다. 우리 억지로 잇지 말고 서로에게 짐이 되지 말자. 이제는 각자 짊어질 게 너무 많은 나이가 되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