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 핀란드의 매서운 추위에도 끄떡없을 것 같은 두툼한 양말들과 한 달을 보내니, 니트의 매력에 눈을 떴다. 검은 양말 무덤인 서랍 속에서 톡 튀어나온 빨간 니트 양말, 욘의 이모가 떠주신 핑크색 덧신은 어딘가 특별해 보였다.
절대 안 할 것이라던 뜨개질은 '재밌어 보이는데 해볼까?'로 넘어갔고, 브이로그 세 개를 보았을 때 기어이 다이소로 가 실과 바늘을 장만했다. 첫 번째 뜨개는 나를 관심으로 이끈 양말. 그놈의 양말이 너무 뜨고 싶었다. 도안을 구매하고, 양말 뜨기 영상을 보며 한코 한코 잡아나갔다. 양말 다음에는 봄용 스웨터를, 스웨터 다음에는 민소매, 가을에는 카디건을, 그리고 겨울에 다시 양말을 떠야지. 급한 성질머리가 어느새 1년 치 뜨개 플랜까지 만들고 말았다. 시간이 나면 방에 앉아 넷플릭스를 켜고 테이블엔 차와 맥주와 와인을 돌려가며 세팅해두고는 곧바로 뜨개를 이어나갔다.
겉뜨기 한 줄. 안뜨기 한 줄. 한코 정도는 틀려도 풀지 않고 넘어가는 게 정신건강에 이롭다는 말을 가슴 양쪽에 깊게 새겼다. 과거의 나는 뜨개질을 정말 지겹고 싫다고 여겼다. 한코의 실수도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하나의 실수를 어떻게든 다시 고쳐보려고 이리저리 처리하려다 지치기 일쑤였고, 계속해서 풀고 수습하는 것을 반복하다 보면 실은 너덜 해져갔다. 시간을 양껏 들였어도 손에 잡히는 것 하나 없어 허무함이 밀려오곤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지. '실수해도 그냥 넘어간다'를 다시 한번 깊게 되뇌며 양말을 떠내려갔다.
결과는 대실패. 발뒤꿈치 부분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이렇게나 큰 구멍이라면 양말 구실은 할 수 있으려나. 웃긴 동시에 귀여웠다. 구멍쯤이야 나중에 뒤집어서 꿰매면 되니까. 조금만 손보면 이 양말은 실내에서 신기에 충분히 따뜻했다. 색이 예쁘다는 할머니의 말에 냉큼 양말을 쥐어드렸다. 날이 추워질 때쯤 다시 양말을 뜨기로 기약하고 조금 더 쉬운 것들을 연습하기로 했다.
다음은 1년 뜨개 플랜 no.1 스웨터 차례. 다시 한번 겉뜨기 한 줄, 안뜨기 한 줄. 계속해서 반복되는 행위를 쌓아나간다.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는 집착을 버리고 나니 뜨개질은 어느새 에너지를 채워주는 시간이 되고 있다. 밖에서 한껏 자극에 노출되고 집에 돌아와 바늘과 실을 움직이는 것에만 집중하다 보면 머리가 비워지고 차분해지곤 했다. 나에게 이렇게 차분하고 집중력 있는 면도 있구나. 한판 두 판 완성되는 것을 보면 성취감도 한껏 솟는다. 와 이걸 해내다니.
시련이 없는 것은 아니다. 완성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실하나 가 풀어진 것을 발견해 하나하나 풀어나가다가 망가져 스웨터의 뒤판 하나를 몽땅 풀어버린 날도 있었다. 절망의 순간. 여태까지의 시간과 노력이 삽시간에 물거품이 되었다. 한없이 아파오는 승모근에서 눈물이 찔끔 났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풀어낸 실을 다시 뜨는 수밖에. 실을 잘 정리하고 다시 코부터 잡아가다 보면, 너덜 해진 실만큼 너덜 해졌던 멘털은 새로운 형태와 함께 다시 서서히 돌아온다. 이때쯤이면 여태의 작은 실수들은 망각된 지 오래다.
뜨개질을 지속하면서 나는 작은 실수에 전전긍긍하는 버릇이 줄었다. 치명적 실수가 아니라면 넘어가는 습관은 일상에서도 지속됐다. '이미 벌어진 일, 할 수 있는 것부터 하자'로 태도가 바뀌니 걱정거리가 현저하게 줄었다. 작은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렇게나 상쾌한 일인 줄은 몰랐다. 여태까지 쌓였던 작은 성취들은 완벽이란 틀에서 벗어나 스스로 작은 실수를 용납할 수 있는 상태로 바꾸어 주었다. 실제로 여태까지 뜬 뜨개 중 한코의 실수도 없는 결과물은 없다.
집중하는 힘을 쓰고 싶을 때, 작은 걱정거리들이 나를 사로잡을 때, 완벽에 사로잡혀 뭐하나 결말을 맺는 게 어렵다고 느껴질 때는 뜨개질로 연습을 해보자. 손끝으로 만드는 고요한 시간을 즐기다 보면 어느새 내가 품고 있던 무언가의 실마리가 보일지도 모른다. 이번 겨울이 다 가기 전에 작은 목도리를 한번 떠보는 것은 어떨까? 뜨개질은 하고 싶지만 사용을 즐기지 않는다면 세이브 더 칠드런의 모자 뜨기를 추천드리고 싶다. 나에게는 단단함을, 누구에게는 따스함을 선물하는 연말을 보낼 수 있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