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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가 Jan 25. 2022

스물여덟, 창업했습니다 (1)

한 번도 안 해봤지만, 해본 것만 하기에는 갇히고 말 거야

대학원을 졸업하고 그대로 연구원을 갔다. 최종에서 떨어진 것만 두 번, 공채가 사라진다는 소식이 심심치 않게 들리는 와중에 취업 준비를 1년이나 더 할 자신이 없었다. 거기에 핀란드 이민 계획까지 실천하려면 빠르게 취업을 해서 돈을 모아 준비를 하는 것이 더 맞다고 판단했다.


"우선 정기적인 수입으로 돈을 모으고, 남은 시간 동안 천천히 나에게 잘 맞는 분야를 찾아야겠다"


나에게 연구라는 길이 딱 잘 맞았다면 좋았겠지만, 여태까지 걸어온 길을 계속 걸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사실 학위도 있겠다, 취업 후 연구원 경력까지 3년 정도 쌓고 핀란드에서 박사를 시작한다면 무리 없이 정착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정 원하는 것을 못 찾으면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 그래도 못해먹겠다는 생각을 한적은 없잖아' 마음을 다져가며 월급의 맛에 취한 것은 고작 한 달. 이렇게 평생을 살 수 있을까? 갑자기 숨통이 조이기 시작했다.


매일 9시간 이상을 꾸준히 투입해야 하는 일이라면 나는 그 일이 재밌기를 원했다. 회사에 있는 동안 오늘 퇴근 후에는 무엇을 할까 하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온전히 몰입되는 일을 찾고 싶었다. 일하는 시간은 상관없으니 내가 이 일을 하는 것이 너무 재밌고 결과가 눈에 보이는 일을 찾고 싶었다. 이대로 살아도 될까. 커리어에 대한 고민이 계속되었다.

고민의 발걸음을 걷던 날들


내가 잘하는 것들, 일을 할 때 재미를 느끼는 요소들을 나열한 후 언어의 장벽 없이 할 수 있는 일들을 나열해 보기도 하고, 여기에 내가 내가 쌓아온 것들을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되짚어본 후 나름의 선택지를 만들어 나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 솜이 할 말이 있다며 불렀다.

회사 이야기, 요즘 사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간단하게 끝마친 후 본격적으로 솜이 입을 열었다.  


"나 해보고 싶은 게 있어, 창업"


하하하. 나보다 심한 이 워커홀릭은 진작에 그릇이 다르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번엔 큰일을 벌려 보겠다 한다. 대학생 시절부터 보던 솜은 항상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곤 했다. 맛남의 광장에서 전화 한통화로 뚝딱뚝딱 못난이 감자 문제가 해결되는 것을 보고 감명을 받은 그녀는 "못난이 농작물" 문제를 화장품 산업으로도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라며 러프안 기획안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솜이 감명받은 문제의 장면


갑자기 심장이 쿵쿵 뛰었다.
너무 재밌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와 진짜 재밌겠다 나도 같이하면 안 돼?
나 디자인도 할 줄 알고 데이터도 다룰 줄 알아
랩 노예 출신이라 제안서 잘 써
돈 안 줘도 되니까 나한테 부탁할 거 있으면 다 시켜


즉석 어필이 시작되었다. 안 그래도 디자인 알바를 부탁하고 싶었단다. 나야 너무 좋지. 나 이렇게 일 벌이기 시작합니다!


나를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가 눈앞에 앉아있었다. 안정적이고 평탄한 연구의 나라에서 벗어나 세상에 던져질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가득 찼다. 우리는 그날부터 "못난이 농작물", "화장품", "사회적 임팩트" 세 가지 키워드를 가지고 어떻게 풀어나가면 좋을지 회의를 시작했다.


뷰티 제품을 만드는 것은 처음이라. 한 번도 안 해봤지만 우리에겐 뷰티업계 종사 5년 차 솜이 있지 않은가. 게다가 숟가락으로 땅 파는 법은 지난 3년간 연구실에 있으면서 숱하게 익혀두었으니 모르는 것은 배워가며 만들면 될 것이다. 두려움 반, 설렘 반으로 어떤 제품이 시장에서 팔리고 있는지, 우리는 어떻게 차별점을 두어야 할지,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이걸 팔아서 진짜 사회에 도움이 되는지"에 대한 가설을 세우고 방법을 찾아나가기 시작했다.


첫 번째 아이디어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기본형 태인 못난이 농작물 혹은 장마 등 재해로 인한 낙과들로 만드는 스킨케어로 결정되었다.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사업계획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아침에는 출근해서 서울시 주차장 관련 연구를 하고, 밤에는 퇴근하고 스킨케어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다. 이중생활이 시작된 지 한 달 여 후 3월, 비즈니스 모델을 정리한 후 예비창업 패키지에 지원했다.




결과는 최종 낙방. 하지만 낙담하기는 일렀다. '겨우 한 달 정도의 아이디어 발전으로 최종까지 가봤으니까,  이거 정말 가능성 있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우선 한번 지원해볼까 였던 마음으로 임했던 솜과 나는 어느새 좀 더 제대로 해봐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있었다.


천천히 찾아봐야겠다는 다짐이 무색하게 기회는 충동적으로 다가왔다. 이 길을 걷다 보면 뭐라도 나올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뭐든 하다 보면 느는 것일 테니 몰라도 그냥 해야겠다. 3개월 전과 똑같이 최종 문턱에서 떨어졌지만, 이번에는 더 할 자신이 있었다. 나는 그렇게 경로를 이탈해버렸다. 힘없이 걷던 트랙에서 벗어나 잔디밭을 가로지르며 달리기 시작했다.


(2)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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