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에어팟을 배송받았을 때가 생각난다. 나는 ‘새 물건’을 갖게 되면 유난을 부리는데, 에어팟을 받은 날에도 그랬다.
그날 배송받은 에어팟을 조심스레 개봉한 뒤 신줏단지 모시듯 가방에 넣어 출근길에 나섰다. 버스 정류장에 앉자마자 주변에 방해 요소가 없는지 먼저 확인하고 천천히 에어팟을 꺼냈다. “헤헤 아무도 없군, 이제 착용해볼까?”
근데 긴장을 너무 많이 한 탓일까? 나는 분명 다한증이 아닌데, 손에서는 홍수가 나고 있었다. 에어팟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에어팟 이어폰'은 '에어팟 케이스' 속에 자성(磁性)으로 내장되어 있다. 하지만 방금 배송받은 내가 그 사실을 알리는 만무 했고, 한껏 흥건해진 손으로 계속 분리를 시도하다 결국 에어팟을 손에서 놓치고 말았다. 아아, 온몸에서 홍수가 난다…
떨어트린 에어팟을 급하게 주워 확인해봤다. 에어팟에는 잔기스만 조금 생겼지만, 내 가슴에는 큰 기스가 생겼다. 그나마 다행인 건 에어팟을 받은 날 에어팟에 대한 집착은 사라졌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항상 그랬다. 나는 새 물건을 갖게 되면 무결한 상태에 집착하게 된다. 근데 내가 아무리 깔끔하게 사용한다 해도 언젠간 생활 기스 하나 정도는 생기기 마련인데, 나는 무슨 부귀영화를 누려보겠다고 이토록 피곤하게 살고 있었을까?
나는 무결함에 집착했다.
나의 집착은 새 물건을 갖게 됐을 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인간관계에서도 그랬다. 나는 상대방과 무결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가식적인 사람으로 살았다. 가령, 내가 가볍게 뱉은 말이 상대방에겐 상처가 될 수도 있을 거란 생각에, 말 한마디 조차 원래 성격대로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쌓아 올린 관계는 금방 무너지고 만다. 한 번은 내가 마냥 착한 줄만 알고 있던 친구와 맞술을 하게 됐다. 아아, 맞술은 ‘베스트 프렌드’에게만 허용된 영역이 아니었던가? 나는 정말 친하다 생각하면 서슴없이 비속어를 사용하는데, 술기운도 올랐겠다 이때다 싶어 친구에게 원래 내 성격을 보여주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술자리는 나의 비속어와 함께 즐겁게 마무리된다. 하지만 친구는 다음날부터 나를 점점 멀리했고,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친구에게 진짜로 마무리당하게 됐다.
그렇다면, 모든 면에서 기스 없는 상태를 끝까지 유지할 수는 없는 걸까? 부질없는 생각이다. 단언컨대, 내가 실수로 에어팟에 기스를 낸 것처럼, 인간관계도 아무리 노력해봤자 나도 모르는 사이 상대방 마음에 생활 기스 하나 정도는 새기게 될 것이다. 차라리 내가 주는 작은 기스 정도는 넓은 마음으로 메워주는 사람을 찾는 편이 빠르겠다.
오늘도 무결함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면 그만 포기해라. 그럴수록 당신만 피곤해지니까. 근데 정작 나한테 가장 필요한 말을 남한테 하고 있으니 조금 웃긴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모범이 되기 위해 앞으로 새 물건을 갖게 되면 일부러 바닥에 떨어트릴 거다(?)
기스 좀 나면 어때? 옥에도 티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