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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마스크를 벗지 않는가?

by 정아름

5월 9일. 실외 마스크 착용 의무가 해제된 지 일주일, 역곡역 맥도널드 2층.


"하나, 둘..."


맥도널드의 미끈한 패티를 씹으며 숫자를 센다.


"팔십삼. 팔십사..."


역곡역 맥도널드는 우리 아이들에게 특별한 곳이었다. 매장 삼분의 일이 놀이터로 꾸며져 '먹기 위해'라기보다 '놀기 위해' 이곳을 찾을 정도였으니. 한데 이 놀이터는 코로나로 이미 2년 넘게 잠겨있다. 어쩌면 요즘 너무 자연스럽게 받아 들여지는. 몇 달 전 코로나가 한창일 때 송도의 2시간에 2만 6천 원 하는 대형 실내 놀이터는 30분 넘게 번호표를 받고 들어갔는데, 너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백"


맥도널드 이층에서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을 본다. 허리가 굽은 채로 바삐 걷는 어르신, 무어라 연신 떠들어 대는 여학생들, 차 사이를 바쁘게 가로지르는 오토바이 배달, 자전거를 타고 힘겹게 숨을 쉬는 젊은 남자. 모두 마스크를 쓰고 있다.


"아홉!"


백 명 중 아홉 명만 마스크를 벗었다. 배가 좀 나온 검은 티셔츠의 젊은이, 잔뜩 멋을 부리고 화장한 아가씨 둘, 뒤에서 젊은 여자가 보는 줄도 모르고 슬쩍 여자 친구의 엉덩이를 만지는 젊은 남자... 백 명 중 아홉 명만 마스크를 벗었다.


"왜지?"


그렇게 바라던, '포스트 코로나'니, '위드 코로나'니 연신 들떠 떠들어대고 기대하던 그날이 왔는데, 아니 일주일이 넘었는데 왜 모두 마스크를 쓰고 있지? 자세히 보니 나이 드신 분들 중 마스크를 벗은 분은 없었다. 그렇다면 이 동네의 특성 때문인가? 나는 서울 동작구 한 대학 바로 옆, 대부분 20대가 다니는 길에서 오늘 (다음 날) 다시 숫자를 세어보았다.


"여덟!"


오히려 더 적다.

감염이 두려워서인가? 바로 옆 식당을 보았다. 저녁 시간 식당은 꽉 차있다. 마스크를 벗고 술을 마시며 연신 무어라 대화를 나눈다. 마치 실내에서 떠드는 것은 괜찮다는 듯이.


주변을 보니 요즘 트렌드에 맞게 배꼽티를 입은 젊은 여성도 마스크는 KF를 쓰고 있다. 배꼽은 보여도 입술은 보일 수 없다는 듯이. '마기꾼'이 되기 싫어서 인가? 화장을 반만 해서인가? 그렇다고 하기에도 8%는 수많은 다양한 사람들과 생각을 반영하기에는 너무 적은 숫자다. 사람들은 왜 마스크를 벗지 않을까? 하도 궁금해 지인에게 물었다.


"나 혼자만 벗으면 이상하게 보잖아요."


우리가 'K 방역'의 효과를 연신 자랑하던 1년 전, 유럽과 미국은 마스크 착용 의무화에 곳곳에서 시위가 일었다. '말 잘 듣는' 우리와 달리 그들은 '감염 위협보다 자유를' 부르짖었다. 이제 K 방역은 끝났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많은 감염자가 나올 때 사람들은 가장 안심하게 되었으며, 정부는 마스크 의무를 해제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단지 접종률과 치사율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의 치사율을 언제나 전 세계적으로 가장 낮았다) 이것은 심리적 위협과 대선, 경제, 그리고 존재문제다.


"현존재가 스스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들이 그 현 존재로부터 존재를 빼앗아 버렸다. 타인들의 의향에 따라 현존재에게 가능한 여러 일상적 존재양식이 좌우된다... 중요한 것은 현존재가 자기도 모르게 받아들이게 되는, 눈에 띄지 않는 타인의 지배다.

-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중"


실외 마스크 의무가 없어진 지금, 실외에서 마스크를 벗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처음 마스크를 벗고 길거리에 들어서면 (마치 무대에 서는 것처럼) 속옷을 입지 않고 걷는 것 같은 어색함과 부끄러움이 있다. 한데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어색함보다는 '무색한' 느낌이 자신을 지배한다.


모두 마스크를 끼고 걷는 사람들. 마치 감염자, 혹은 반항자를 바라보는 듯 힐끔 바라보는 시선들. 이 느낌은 나에게 어딘가 익숙하다. 이명박 정부 때 종로거리에서 밤새 물 대포를 맞고 옷과 구두가 흠씬 젖은 채로 첫 지하철 1호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를 힐끗 바라보던 그 많은 눈 빛들.


"자유는 어떤 풍토에서나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므로 모든 국민이 자유를 손에 넣을 수는 없다."

-루소, <사회계약론> 중"


2002년 월드컵 그 무수한 붉은 옷과 광기와 단합을 보고 난 두려웠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이 한국의 저력'이라고 '한강의 기적을 일으킨 힘'이라고 떠들어 댈 때 난 두려웠다.


모두가 붉어야 한다는 그 강압.


실외 마스크 의무가 사라진 지금, 사람들은 모두 마스크를 낀다. 홀가분한 자유보다 답답한 편안함이 더 좋다는 듯. 난 두렵다. 마스크를 끼지 않은 나를 보는 시선들이 두려운 것이 아니다.


이 모습을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을, 자유를 훔치려는 자들의 시선이 두렵다. 곧, "이들은 속박받는 것을 편해하는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들.


"이 자유를 다시 뺏어도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겠구나. 아니 오히려 감염의 두려움을 더 부추긴다면 이 속박을 오히려 더 환영할지도 모르겠구나."


라고 생각할지 모를 사람들. 탈취는 비상시국에, 혹은 비상시국을 조장하는 분위기 속에서 쉽게 이루어질 수 있음으로. (우리는 오늘 상하이의 모습을 보고 있지 않은가!)


이제 마스크를 벗지 않는 진짜 이유를 한 번 생각해 보자. 진정 감염의 두려움이라면, '마기꾼'이 될 것 같은 두려움이라면 잠시 더 쓰고 있자. 하지만 그것이 다른 사람들의 시선 때문이라면 과감히 벗고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자. 분명 처음은 어색할 것이다. 하지만 장담하건대 머지않아 다신 쓰고 싶지 않은 기분이 들 것이다.


진정한 자신이 되는 데는, 자유한 한 인간이 되는 데는 용기와 함께 연습이 필요하다. 자유인이 되는 연습을 마스크를 벗는 일탈로 시작해 보는 것은 어떤가? 어렸을 적 눈을 보고 이야기하지 못하던 수줍은 소녀가 대화를 연습하듯이.


자유를 즐기자!

주어진 자유를 지키지 않는다면, 이 자유는 곧 내가 아닌 그 누군가의 것이 될 것이므로.


-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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