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에 유일하게 있던 피아노 학원에서 나는 '바이엘 상'을 어렵게 끝냈다. 특별한 재능도 끈기도 없었다. 이후 한산도 섬에서 4년을 살았는데 할머니 열 분이 계시는 섬마을 교회를 다녔다. 그리고 피아노를 칠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 이유로 나는 피아노석에 강제로 앉게 됐다. 황당한 상황이었지만 달리 도망갈 곳이 없어 주저앉았다.
그렇게 매주 맥락 없이 다 장조의 찬송가를 일주일 동안 두 곡씩 연습해서 한 손으로 겨우 곡을 쳐냈다. 할머니들의 육자배기 노래와 한 손의 피아노에 하모니는 없었지만 띵, 띵, 소리가 작은 예배당 안에 울릴 때 할머니들은 박수를 치며 그 시간을 즐거워하셨다. 나는 계속해서 섬에서 남아도는 시간에 야매의 피아노를 터득하게 됐다.
섬마을에서 수영 대신 선택한 나의 야매의 피아노.
동네 아이들이 바다에서 놀 때 나는 혼자 교회에 있었다. 덩그러니 놓인 피아노에 앉아 찬송가를 펴 놓고 오른손 따로 왼손 따로 쳐 보았으나 두 손이 합쳐 연주하는 것은 쉽사리 되지 않았고, 피아노 앞에서 섬에 갇힌 열다섯의 시간들을 맘껏 저주했다.
수영을 배워서 그래서 수영을 잘해서 바다로 뛰어들었다면 열다섯의 시간이 좀 더 싱그럽지 않았을까. 그 시절 나는 섬에 갇혀 있다는 생각에 참 많이도 울었다. 운이 나쁜 건지 내가 마음을 열지 않은 것인지 동네에는 가까운 친구가 없었다. 전학 온 여자아이의 별 볼일 없는 자존심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남자아이들 속에 온전히 섞이기가 어려워 겉으로만 돌았다. 바다로 꽉 막힌 공간에서 나는 피아노 건반을 마구 수없이 때렸고, 부모님은 열심히 피아노 연습하는 내가 주님의 은혜를 받아서 그런 것이라고 동네방네 자랑을 하셨다.
야매로 배운 피아노는 더 이상 발전하지 못했다. 당연했다. 이십 대에 되어선 이상하게 피아노에 욕심이 생겨 맘먹고 연습을 했는데도 나아지지 않고 오히려 더 촌스러운 반주에 머물렀다. 그래서 정식으로 피아노를 배우려고 학원을 상담을 갔는데 등록도 못하고 도로 나왔다. 흥부가 어딜 가나 내쫓긴 기분이 이랬으려나.
원장의 말은 아주 오랫동안 잘못된 방식으로 피아노를 쳐 와서 고칠 수가 없고 그래서 자신은 가르칠 수가 없다고 했다. 원래도 나는 사람들 앞에서 피아노를 치는 것을 썩 좋아하지 않았는데, 피아노 원장의 말을 들은 이후로 아무도 없을 때만 피아노를 치게 됐다.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간 늦은 오후 교회에 남아 오직 나만 들을 수 있는 피아노 연주를 했다.
작년 여름, 복층 빌라 집으로 이사를 하고, 가장 사고 싶은 것이 있으면 사라는 남편에 말에 나는 "!"
'피아노'를 생각했다.
위층 창가 앞에 흰색 전자 피아노를 놓았다. 복층이라 이런 것이 좋을지 몰랐다. 위층에 피아노가 있기에 이웃에게 방해되지 않는 선에서 띵띵 거릴 수 있고 피아노를 치고 난 후 찾아 온 낯선 평안의 여운. 열다섯, 바다가 보이던 교회의 소녀에게도 어쩌면 평안함이 잠시 잠시 파도처럼 밀려왔다는 걸 알았다.
나만의 공간에서 나 혼자 맘껏 들을 수 있는 야매의 피아노를 칠 수 있다. 누가 들을까 봐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되고, 잘못된 방식의 피아노 반주법이든 아니든 나는 나를 위해 피아노를 치면 된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기 전, 나는 피아노 뚜껑을 연다. '행복이라오' 찬양을 한 번 부르고, '오 신실하신 주' 찬송가를 정성 들여 쳐 보고, 캐논의 대목대목 칠 수 있는 부분만 두들겨본다. 그리고 울며불며 피아노를 때렸던 열다섯의 날들이 지금에 와서 이렇게 좋은 날들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나이에는 절대 알지 못했던 것들의 비밀을 그래그래, 하며 주억거린다.
하지만 무엇인가 누군가를 원망하고 저주했던 것들조차 시간이 흐른 뒤 무엇으로 바뀔지 모른다는 인생의 신비는 꼭 나이를 먹어야만 아는 건지. 아주 조금이라도 예감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래서 불현듯 떠오르는 보기 싫은 그 무엇에게 조금은 너그러워져 볼까, 하는데 그때처럼 지금도 잘 되지 않는다.
'야마하가 아닌 야매'의 피아노를 치는 위층 여자는 아이들이 오는 소리에 피아노 뚜껑을 닫고 아래층으로 내려간다. 이르지도 늦지도 않은 오후 3시 05분.